정조가 다산 정약용을 매우 아꼈으며 이 때문에 그를 중앙의 높은 관직에 두고 싶어 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정조 주위의 신하들은 다산이 중앙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다산이 천주교라는 사악한 종교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유교만을 추종하던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라는 이단의 종교와 학문을 신봉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행위였다. 이에 다산은 1797년 자신이 맡고 있던 관직인 동부승지를 사직하면서 자신을 천주교 신자라고 비방하는 문제에 대해 세세하게 해명하는 상소를 정조에게 올린다.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라는 유명한 상소문이다. 상소문은 매우 길지만, 요점은 젊은 시절에 잠깐 천주교에 빠진 것은 사실이나 진산사건 이후로 완전히 빠져나와 지금은 원수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상소문을 읽고 “상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착한 마음의 싹이 마치 봄바람에 만물이 자라는 것 같다. 종이에 가득히 열거한 말은 듣는 이를 감동시킬 만하다. 너는 사양치 말고 직책을 수행하라”고 비답한다. 이 상소를 통해 정조는 다산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다산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바뀌지 않았다. 정조는 다산을 당장 중앙관직에 쓸 수 없었다. 결국, 다산은 황해도 곡산부사에 제수되어 지방으로 떠나게 된다.
곡산부사 시절의 다산 정약용의 활약은 눈부시다. 부임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이계심과의 만남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다산의 전임자 시절 곡산에서 아전의 농간으로 인해 200냥의 세금을 900냥으로 올려 착취한 일이 있었다. 이때 이계심이 주동이 되어 백성들이 관아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관노들이 이들을 진압하자 이계심은 달아나 수배자가 되었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임명되자 채제공 등 대신들은 이계심을 잡아 극형에 처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그 이계심이 다산이 곡산부사로 행차하는 길목에 나타난 것이다. 이계심은 당시 벌어진 사실과 백성들이 원하는 조항을 적은 글을 바치고는 자수하였다. 아전들이 이계심을 체포하려 하자 다산은 이를 제지하고는 “장하다.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의 원통함을 대변해주었다. 이런 사람은 천금을 주고 구해야 할 것이다”라며 무죄방면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의 경험들이 훗날 <목민심서>라는 명저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다산 정약용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그렇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신유박해 당시 고문 끝에 옥사한 학자 이가환은 “저들은 학문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공갈하고 있다”고 하였다.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씨는 “서양의 외압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서양을 연구해서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그로 인한 식민지화의 원인이 1801년의 신유교난에서 시작된다고 나는 보고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다산의 인품과 정치적 역량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그렇지만 진실이 중요하지 않았고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정적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에는 그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갈 길을 잘못 선택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때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는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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