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현대인의 욕망이 ‘간접화’돼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의 삶을 모방하고, 성공한 CEO가 되고자 하는 자는 스티브 잡스의 삶을 모방하며, 연예인이 되고자하는 자는 자신의 좋아하는 연예인을 모방한다. 우리는 어떤 ‘중개자’(예수, 스티브 잡스, 연예인)의 삶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다.
더 중요한 점은 인간의 욕망 자체가 바로 그 중개자들에 의해 심어진 것이다. 나의 욕망은 자연적으로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중개자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예를 들어, 목이 타는 더운 여름날에 내가 마시길 원하는 것은 ‘데자와’ 혹은 ‘코카콜라’지 단순한 마실 것이 아니다. 물론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을 갈구하는 것은 내게서 나온 ‘욕구’다. 하지만 그것이 ‘코카콜라’라는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TV CF가 나에게 심어준 ‘욕망’ 때문이다. 생리적 욕구와 정신적 욕망은 분명 다르다.
지라르는 욕망이 개인의 내면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을 ‘낭만적 거짓’이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근대 정신사의 거대한 흐름 중 하나인 ‘낭만주의’는 개인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낭만주의는 사회 대신 개인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반면 그는 욕망의 진정한 구조(‘욕망의 삼각형’)를 근대 소설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욕망은 ‘구조’ 혹은 ‘관계’의 산물이다. 이것이 곧 ‘소설적 진실’이다.
사실 지라르의 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욕망의 구조를 느끼고 또 체화한 채 살아간다.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 광고, 건물 외벽에 걸린 화보들, 수많은 유튜브 스타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세지를 주입하고 있음을 안다. 그 메시지들은 우리를 더욱더 노예화한다. 우리에게 더 일하고, 더 공부하고, 더 살을 빼라고 독촉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노예화하는 메시지가 헛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예속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 이 통찰력은 무력하다. 꿰뚫어본다고 해서 통찰력 있는 사람이 매혹에서 풀려나지는 못한다.” 욕망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욕망의 구조에서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옥의 구조를 알더라도 탈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 주변의 모든 인간이 우리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는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느니, 누구는 살을 엄청 빼서 예뻐졌다느니 같은 이야기는 어디서나 좋은 대화 소재가 된다.
패배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람들은 자발적 노예의 길에 들어선다. 모든 사람이 자발적 노예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이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 존재의 중개자가 된다. 사업에 성공한 친구가, 멋진 옷을 입은 선배가 나의 신이 된다. 끝내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이 모방해야할 ‘신(중개자)’으로 보이게 된다.
이 책에서 지라르는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속물만이 진정으로 다른 속물을 안다. (…)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이 분개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속물들을 비웃는 사람 역시 똑같이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지라르의 문제틀을 뛰어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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