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1692년 1월, 매사추세츠의 항구도시인 세일럼(Salem)에 한 목사가 부임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친딸과 조카딸이 발작을 일으키며 이상 행동을 시작했다. 두 소녀를 치료하던 의사는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이상한 주장을 했다. “이게 다 마을에 숨어있는 마녀들 때문이야!” 의사의 말은 마을 주민을 자극했고, 주민들의 추궁에 어린 소녀들은 하녀 한 명을 마녀로 지목했다. 이후 두 소녀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소녀들이 늘어났고, 아픈 소녀들이 지목하는 마녀도 점점 더 늘어나 마녀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재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당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으로 약해져 가는 신앙심을 회복하려는 교회세력이 이 재판을 주도했고, 세일럼의 유력 가문들은 자신의 딸이 마녀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속여 자신의 경쟁자를 마녀나 악마로 지목하게 함으로써 정적 제거에 이용했다. 결국, 13명의 여자와 6명의 남자가 마녀와 악마로 몰려 처형됐고, 남자 한 명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바로 마녀사냥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인 ‘세일럼 마녀재판’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마녀사냥에서 마녀를 감별하는 방법은 더 황당하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물과 불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손과 발을 묶은 채 물속에 던져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유죄인 ‘물의 길’과 불에 달궈진 쇠판을 걷게 해 죽으면 무죄, 살아나면 유죄인 ‘불의 길’이 그것이다. ‘물의 길’과 ‘불의 길’은 결국 유무죄와 상관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감별법이었다.
그런데 과거의 악습으로 없어졌어야 할 마녀사냥은 형태를 달리해 지금도 종종 목격된다. 최근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를 놓고 쏟아지는 일부 언론의 의혹 보도를 보며 마녀사냥이 떠오르는 것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마녀사냥은 집단이 특정 개인을 ‘단정’ 짓고 공격하는 행위다. ‘너는 마녀야’라고 집단이 단정 짓고 공격하면 지목된 사람은 유무죄와 관계없이 죽어야 했다. ‘넌 부도덕해’, ‘넌 범죄자야’라고 한 개인을 단정 짓고 언론이 공격하는 순간, 표적이 된 개인은 유무죄와 관계없이 평생 낙인찍혀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다.
언론의 단정과 공격은 끝없는 의혹 제기 보도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보도들은 확실한 증거와 사실관계에 대한 취재 없이, 짐작과 편견, 그리고 자신만의 당위와 이익으로 쓰인다. ‘자녀 의혹, 부동산 의혹, 금융거래 의혹, 회계 관리 의혹, 독단적 단체 운영 등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쏟아내며 표적이 된 개인을 부도덕한 범법자로 만든다. 여기에 단체의 성격이나 의도를 알 수 없는 ‘000단체 수사 촉구’, ‘000단체 구속 촉구’라는 보도로 공격력을 높인다. 이때쯤 되면 정치권과 권력기관에서 이해관계가 있는 세력이 증원군으로 가세한다. 표적이 된 개인이 의혹 제기에 맞서 해명이라도 하게 되면, 그 해명에 대한 의혹이 또다시 쏟아진다. 더 참혹한 일은 혹독한 마녀사냥이 끝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무죄가 밝혀져도, 이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거나 단신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표적이 됐던 개인은 언론이 씌운 오명을 쓰고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물의 길’과 ‘불의 길’ 방식은 지금도 유효한 마녀 감별법으로 남아 있다.
비단 언론의 마녀사냥이 우리나라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얼마 전 격동의 세월을 보내며 ‘기레기’, ‘사냥개 언론’이라고 조롱당하는 우리 언론이 여전히 자기반성 없이 마녀사냥에 몰두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필자는 이글을 통해 정의연과 정의연의 전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국회의원을 변론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은 정의로운 검찰과 법원에 의해 밝혀질 테니, 비판은 그때 해도 늦지 않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언론 보도의 옥석을 가려 더는 마녀사냥에 동참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좋은 보도는 취재가 바탕이 돼야 한다. 취재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이 왜 발생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단순히 사실만 전하는 보도는 좋은 보도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육하원칙 중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만 있고 ‘왜’가 빠진 보도는 좋은 보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넘쳐나는 보도를 보다 보면 ‘왜’는 물론이고, 사실 자체도 제대로 취재가 안 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일수록 마녀사냥에 나선 보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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