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러 선거 정국(政局)을 거치면서 ‘공정(公正)’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공정에 대한 여러 담론을 지켜보면서 이전에 읽었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이 책은 여러 딜레마 상황을 상정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판단의 기준을 허물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공정은 어떨까?
‘공정’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름’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공정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른’ ‘공평(公平)’에 가깝다. 이는 공정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배경과 관련이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말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취임사에 일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특권과 특혜, 차별이 우리의 사회적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특권과 특혜, 차별은 부와 권력을 가진 부모가 사회적으로 선망 받는 직업과 부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속칭 ‘부모 찬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 중심에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반감과 좌절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공정은 선발 과정에서의 ‘공정’, 아니 ‘공평’에 집중됐다.
인류가 공평한 인재 선발을 위해 고안한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시험이다. 하지만 공적인 인재 선발에 시험이 도입된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한 최초의 제도인 ‘과거제’는 중국 수나라 때 처음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신분을 기준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음서제’가 더 활발했고, 과거제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관료 선발 제도로 정착했다. 타고난 신분에 의해 관직을 세습하던 사회가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사회로 변화했으니 당시는 정말 혁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제는 더는 공평한 시험이 아니었다. 대리 시험이나 부정행위를 시도하는 무리는 어느 시대나 존재하니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19세기 세도 정치로 인해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기득권이 뇌물을 바친 사람은 합격, 그렇지 않은 사람은 탈락시키며 공평을 잃어버렸고, 과거제는 허울만 남게 되었다.
이런 과거제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시험의 공평이란 뇌물에 좌우되지 않고 시험성적에 의해서만 선발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공평은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부모의 권력이나 재력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시험성적으로만 선발하는 시험이다. 그런데 이런 공평한 시험이 공정한 것일까?
여기 ‘부자’와 ‘서민’이란 학생이 있다. 두 학생은 외모, 지능, 건강, 성격 등 개인적인 능력이 모두 똑같다. 다만 부모의 재력엔 큰 차이가 있다. 부자의 부모는 부자에게 최상의 사교육을 지원했고, 부자는 최고 명문대에 진학했다. 대학생 부자는 경제적 부담 없이 학업에 집중했고, 방학이면 해외어학연수는 물론, 부모의 인맥으로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며 입상도 여럿 했다. 서민의 부모는 형편에 맞게 영수학원 정도만 지원해줬다. 그래도 서민은 기특하게 중상위 국립대에 진학했다. 부모의 형편을 알기에 대학생 서민은 늘 알바를 하며 학업에 임했고, 방학이면 알바를 늘리고 토익학원과 대외활동에 집중했다. 서민은 늘 피곤했고, 강의시간에는 졸음이 쏟아졌다. 대학을 졸업한 부자와 서민은 아주 공평한 시험에 함께 응시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 공평한 시험은 공정한 결과를 냈을까?
우리는 공정을 논할 때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한 수 없는 차이에서 오는 불공평에도 주목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존 롤스의 말처럼 “내가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 재능이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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