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입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며 인터뷰 질문지 작성법을 설명할 때마다, 내가 유독 강조하는 말이 있다. “좋은 답을 들으려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인터뷰 때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취재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묻는지 애매한 질문이면 답변하는 사람도 애매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사전 조사 없이 형식상 수 채우기용 질문을 던지면, 답변하는 사람도 형식 상 시간 채우기용 답변으로 응할 수밖에 없다. 미흡한 질문만 던져놓고 취재원이 ‘알아서 잘’ 대답해주길 바라는 기자들을 적지 않게 봤기에, 다른 기자들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자 교육 때마다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좋은 기사를 쓰려면 좋은 답이 필요하고, 좋은 답을 얻으려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얼마 전 인수인계 준비를 위해 기자교육 자료를 들여다보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어떤 질문이 좋은 질문인지 말해 준 적이 있었는지 말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안 좋은 질문의 예시를 몇 개 들었으면 들었지, 좋은 질문이 뭔지는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다. 좋은 질문란 건 대체 어떤 질문일까? 아니, 애초에 ‘질문’이란 건 대체 뭘까. 보통 질문이라고 하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물음’이라는 질문의 기초적인 정의를 떠올리기 쉽다. 물론 그것도 질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질문’의 범위는 조금 더 넓다.
내가 생각하는 광의적 차원에서의 질문은 ‘기존의 질서에 새로운 균열을 내는 어떤 물음’이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 ‘질문자’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았다. 20세기 초 유럽에는 ‘왜 여성은 투표할 수 없냐’며 여성 참정권을 위해 광장으로 나온 서프레저트(Suffragette)가 있었다. 1955년 미국에는 ‘왜 흑인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당해야 하냐’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펼친 흑인해방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한국에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노동 환경 개선과 노동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있었다.
이런 질문자들이 과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질문자들이 사회에 던진 질문이 만들어낸 변화로 세상은 이전보다 더 문명적인 곳이 됐지만, 그 세상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흑인 차별, 여성 차별, 노동인권 보장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이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지금 사회는 절대 결백하지 않다. 당장 지난해에도 미국에서 한 흑인이 경찰에 의해 불필요한 과잉 진압을 당하다 질식해 숨졌고, 현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20대 여성 10명 중 7명은 ‘취업 시장에서 성차별이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는 있지만, 올해만 해도 벌써 충북에서만 11명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일하다 죽었다. “쉬는 시간 1시간을 오롯이 쉬게 해 달라”는 상식적인 요구를 위해 한 식품회사 노동자는 53일 동안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다.
타협이 미덕인 것처럼, 부당함에 대한 묵인이 사회성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낙관하기 힘든, 비관이 부동의 현실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끝없이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그러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꿋꿋이 물음표를 피워낸다. 그렇게 피워낸 물음표에 사회가 응답할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질문은 더 이상 질문자‘만’의 질문이 아니게 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진보가 되어, ‘정답’이 되어 세상을 바꾼다. 이전의 질문자들이 사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듯이. 은유 작가는 <크게 그린 사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광장에서 운다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는 일이다”. 광장에서 우는 일이 타인을 위해 우는 일이라면, 거리에 나서 이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일은 우리 모두를 위해 질문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부끄럽지만 이 글은 사실 칼럼이 아닌 일종의 ‘연서’다. 그동안 내가 기자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모든 질문자에게 보내는 찬사다. 세상을 바꾼, 세상을 바꿀 이 사회의 모든 질문자에게 보내는 열렬한 사랑 고백이다. 정답 없는 세상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당신들이 진짜 정답이라고. 지난 3년간 <충북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나를 가장 가슴 뛰게 만든 건 이런 질문자들의 바로 옆에서 기록자로, 때로는 그 질문자들을 대리하는 또 다른 질문자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문사에서 이뤘던 성장의 출처를 찾는다면 아마 8할이 당신들일 것이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에 함께하고 싶어서, 그 옆에 서 있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이제껏 글을 썼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마음을 품게 해준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충북대신문>에서의 내 마지막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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