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르트르의 유명한 저작 중 하나인 <구토>는 그의 초기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민한 철학적 감각을 느껴보기에 가장 적합한 소설이다. 소설의 부분 중 하나인 ‘편집자의 일러두기’를 보면, 그들은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한 남자의 수기를 “전혀 손대지 않고 발행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인과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혼란스러운 문장의 연속이 이 책의 전부다. 물론, 그 내면의 혼란에는 로캉탱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자명한 한 중심이 존재한다.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원인이고 책의 제목이기까지 한 ‘구토’다.
책은 로캉탱의 “그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다”라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지독한 골머리를 앓는다. 그가 그토록 괴롭게 찾아다닌 것, 자신의 변화는 다름 아닌 ‘구토’였다. 그는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라며 자신이 처음 그것을 느꼈을 때를 완전히 떠올린다. 그 불쾌한 느낌,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 로캉탱을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 ‘구토’가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구토’는 갑자기 왔다가 또 갑자기 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구토’의 원인, 본질과 닮아있다.
‘구토’의 원인은, 아니 구역감이 드는 바로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다. 실존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로캉탱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존재의 우연성, 쓸데없음, 이유 없음, 완전한 무상이 그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존재가 무상하다니?
로캉탱은 이러한 ‘구토’의 신경증이 아녔다면 “‘존재한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흔히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의 이름이나 색깔, 모양, 지위, 물성 같은 것들로 그것을 ‘붙잡으려’ 든다. “색깔들, 맛들, 그리고 냄새들은 결코 진짜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그것들 자체, 오로지 그것들 자체는 결코 아니었다” 로캉탱은 ‘~이다’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나뭇잎은 초록색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초록색이다’는 나뭇잎과 매우 유사할 순 있지만, 결코 그것 자체는 아니다. 더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나는 학생이다.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학생이기에 수학에 열심을 다한다. 수업에 명랑히 깨어 있고, 펜을 들어 필기하고, 가끔 여유가 나면 동기와 점심을 함께한다’ 이 모든 ‘~다’의 것들은 관념이다. 그럴싸하게 존재를 포장해 눈에 보이도록 한 사회의 속성이다. “기능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존재가 “무엇인지는 대충 이해하게 해주지만, 이것은 전혀 아니”다. 이 모든 관념이란 방어막이 사라진 존재는 그저 연약하다. “이것은 다만 이것일 뿐이다” 무엇의 의미도 없다. 로캉탱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라고 자신의 깨달음을 밝힌다. ‘우연히 그곳에 태어남’만이 존재하는 이유다. 흔히 말하는 ‘행복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라는 당위는 허위라는 이야기다. 존재가 연역될 수 없다는 것은, 존재에 그 무언가가 앞설 수 없다는 말이다. 진실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존재와 존재를 의식하는 생각뿐이다. 그렇기에 로캉탱은 “구토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우리는 ‘구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구토’는 나 그리고 우리 자신이다. 더 정확히는 바로 그 존재이며, 의무도 의미도 없는 쓸데없고 우연한 존재의 무상함이다. 사르트르의 로캉탱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다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게 됐”고, 그의 삶은 “아무렇게나,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 자라나고 있”게 됐다. 정말이지 음울하고, 허무하고, 슬픈 이야기다. 하지만 심히 건조하고 차가운 로캉탱의 감각은 자유와 삶을 역설한다. 존재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회가 말하고 부여하는 여느 속성이나 관계, 심지어는 삶의 이유마저도 우리를 속박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자유롭고, 그 무엇도 가능하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단지 자유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에 존재 외에 다른 이유는 없지만, 존재야말로 “인간이 결코 떠날 수 없는 꽉 차 있음이다” 그렇게 존재와 그들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
요즘 우리 세대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 나름의 목표는 있지만,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우리에게 로캉탱의 깨달음은 건조하지만, 매우 큰 위안이 돼 준다. 존재에서 찬란한 의미와 여러 관념을 박탈하고 그 나약함을 고발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무한을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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