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상 (국어국문학과·04)
<당선소감문> 졸업을 앞두고 당선 소감을 쓴다는 게 쑥스럽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의 기회를 제가 가져간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 빚으로, 저의 부끄러운 소감 대신 글을 쓰기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몇 가지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글쓰기라는 작업은 진입장벽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습니다. 단지 잉크똥 굴리는 볼펜과 넘기는 소리가 경쾌한 노트 정도가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하루 한 시간의 시간만 들여 6개월간 꾸준히 글을 써도, 혹은 일기문을 써도 자신의 고유한 문체가 잡힙니다. 그리고 글을 잘 써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문체가 좋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은 더 하지 않아도 부족한 말이라는 것을 아실 줄 압니다. 글을 쓸 때에는 책읽기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지식 아래 생긴 폭 넓고 깊은 관심사는 세상을 좀 더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간접 체험으로 자신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실제 체험이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보다 큽니다. 체험은 글을 진실하게 만듭니다. 또, 문학적 글쓰기에 덧붙이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정해 비슷한 글을 써보거나 세계관을 모방해 습작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비가 변태해 껍질을 벗을 때까지 더없는 자양분이 되어 주기도 하거든요.
단연 시나 소설쓰기라는 글쓰기 이외에도, 글쓰기라는 작업은 우리가 사는 일상에 알게 모르게 이롭게 작용합니다. 오타나 탈자 없이 온전하게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깨끗하게 밖으로 내보이는 셈입니다. 저는 그렇게 깨끗한 얼굴을 보인 바 없어 부끄럽지만,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면 제가 처음 학교를 다닌 7년 전보다 맑은 얼굴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해 봅니다. 일상적 글쓰기에서도 글은 내면을 아름답게 합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소설을 끄적여 오는 내내 격려를 해주신 부모님께 배부른 사람이 되는 글쓰기를 하지 못해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학에서의 글쓰기 내내 버팀목이 되어준 창문학동인회 후배들에게 건필,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놉시스
4학년 마지막 학기, 강민과 남열, 우주는 범상치 않은 강의와 접한다. 중간, 기말 시험도 없고 강의도 없고, 다만 기말의 보고서 발표만 있는 기묘한 과목. 그들은 나름대로 실험 주제를 정하는 데, 그것은 꽤나 독특한 것이었다. 어떤 개인의 일상에 파고들어 그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 그리고 그의 변화된 일상을 채록하는 것. 평범하게 길을 가는 그에게, 면접장에 가는 그에게,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그에게, 학교 강의실에서의 그에게 모두가 아는 체를 해온다. 그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가. 그 와중에, 그가 동경하던 여학생이 아는 체를 해 오는데……. 그게 현실인지 누군가의 장난인지 알 수가 없다. 소설은 모두가 아는 사이가 되는 시공간을 상상해본다.
*1인칭 시점인데, 강민의 시점과 실험대상 표본A인 김다정의 시점, 두 시점이 나옵니다. 어떻게 구분해야 할 지 고심했는데, 단락구분 위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아는 사이
오전의 강의실은 예상 밖으로 한산했다. 으레, 첫 강의를 앞두고 교수가 어떠니 과목이 어떠니 곳곳에서 수군대는 것은 당연해 보였으나 조그마한 소리로라도 떠드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우리 4학년 동갑내기 셋을 제외하고. 남열이는 강의계획서를 몇 부 뽑아오더니 침을 발라가며 들춰보고 있었다. 오랜 휴학 끝에 제적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 간신히 복학한 여학생 우주는 그것을 보고 거드름을 피워댔다.
“그런 거 다 필요 없다니까? 강의계획서는 보통 방학 때 작성하잖아. 분명 낚시였을 거야. 강의계획서 바뀌었다에 내 졸업장을 걸게. 내가 이상한 책 샀다가 피 본 게 몇 번 인지 알아? 근데 언제 뽑아온 거야?”
“오늘 아침에.”
나는 남열이의 손에 들려 있던 강의계획서를 날름 가져와 훑어보았다. 남열이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없어 편하게 들을 수 있을 거라 말을 했고, 우리는 그의 말과 동시에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었다. 우주의 우려와는 달리 강의계획서 안에는 ‘중간, 기말고사 없이 통합보고서 발표 가짐.’ 단 한 줄만 작성되어 있었다. 주별 강의 요목은 예외 없이 공란만 가득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뭐 어때. 시험을 안 본다잖아.”
방학에 뭘 했느니, 졸업하고 뭘 할 것이니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교단의 정 가운데에 서서 강의실을 한 눈에 조망하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입에서 강의계획서대로 중간과 기말의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이 재확인 조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소셜네트워크 강좌의 이상해입니다. 자세한 건 강의계획서를 참조하시고, 아, 아무 것도 안 씌어져 있다고요? 제 홈페이지를 보시면 전 학기 수업을 들은 선배들의 보고서가 있을 겁니다. 그걸 참고로 해서 보고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이거 뭐 추석이다, 개교기념일이다 해서 수업을 할 시간이 없네요. 그냥, 쉽시다. 이건 메모를 해 두세요. 종강 주 토요일 9시부터 6시까지 발표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날은 시간을 비워 두시고요. 질문 있습니까?”
“교수님, 학기 중에 수업이 아예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기 검정고시를 치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6년, 3년, 3년, 도합 12년을 배웁니다. 그게 역사가 되었건 수학이 되었건 영어가 되었건 간에 타인의 생각을 주입받죠. 완전히 자기 생각이라는 것은 요, 요 감싸 쥔 주먹 안의 공기만큼 존재하는 겁니다. 대학에서부터는 순 자기 공부죠. 의미 없이 강의실에 앉아있느니, 그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제가 부여한 과제물은 최소한의 강의 의도를 짚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수님, 그렇게 하시면, 학교에서 안 짤리십니꺼?”
한 학생이 조금 센 억양으로 물었는데, 교수는 그 말을 듣더니 씩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러다 질문을 한 학생의 눈을 쳐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잘렸으면 진작에 잘렸겠죠? 자, 다음.”
발표 과제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몇 마디 이어지고, 교수는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정말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저 의뭉스러운 웃음을 가진 남자를 다시 보지 못하는 걸까. 강의가 시작한 지 10분 만의 일이었다. 시원스럽다고 하기에도 뭐하고, 화제의 인물이 나간 뒤 강의실은 별안간 시끌벅적해졌다. 서로가 오늘 생경한 사이들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뭐 이런 강의가 있냐고 묻기 바빴다. 좋아하는 학생 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머지 반이었다.
“아홍……. 좋다……. 우리, 가자.”
“뭐?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가자니까…….”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나는 남열이와 우주의 가운데에 끼어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개강 첫날인데 한잔 붓는 게 어떠냐는 우주의 성화에 우리는 대낮부터 문을 연 술집을 찾아야 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이렇게 시작할 줄이야, 나는 속 편한 우주의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뿐해 보이는 얼굴의 남열이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보고서를 위해 다시 만난 건 개강 후 보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쇼윈도 쪽 자리였는데 좋은 자리는 우주가 선점한 뒤였다. 우리 둘이 이것저것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야, 남열이가 느릿느릿 문을 밀고 들어왔다.
“뭔가 가닥이 잡혀? 난 전혀 감이 안 오는데.”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관계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오라는 거 아냐…….”
커피 잔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의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며 거절당했고, 저마다 사람들이 지나는 창밖만 바라봤다. 밖에는 어떤 여자가 'Free Hug'라고 씌어진 보드를 들고 있었다. 아, 내가 왜 이걸 지나치고 있었던가. 분명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그저 농담으로 쪼개고 말았었다. 서로, 네가 나가면 안아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며.
“‘모두가 아는 사이’ 어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무슨 소리야. 이제 지쳐서 말도 안 나오나 싶었는데. 그냥 내일 봐. 각자 아이디어를 만들어오기로 하자고.”
“아니, 잘 들어 봐. 나 저번에 말야, 이런 적이 있었어. 강의실 복도에서 누가 나를 향해 인사를 해왔던 적이 있었어.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 거야. 인사를 해오는데 그냥 무시하기도 그렇고……. 그 사람이 내가 알아보지 못한 아는 사람이면 어떻게 해? 그리고 대놓고 아는 척 하기도 그렇잖아. 정작 알고 보니 나를 모르는 사람이고 뒤를 돌아보니 인사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쪽팔린 거잖아.”
갑자기 튀어나온 나의 말에 남열이와 우주의 얼굴은 일단 들어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끼고 있던 팔짱까지 풀고서.
“내 뒤에, 아무도 없다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어. 상대는 분명 모르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이해 할 수 있도록 말을 해봐.”
“우리가 그 인사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현대인은 사실 고독하고 쓸쓸하잖아? 여지껏 그냥 지나치기만 하던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그 사람의 인연이 되어 주는 거지. 난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보고서는? 생각해 봤어? 아이디어만 있잖아.”
“생각은 안 해봤어. 그냥, 그렇게 실험한 결과를 쓰면 되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하되 인간관계가 좁고 닫혀 보이는 사람을 찾는 거야. 우리의 실험을 통해서 그의 인간관계가 밝아지고 넓어지는 거지.”
“재미있는 생각이긴 해. 그런데……. 이거 잘못하면 은팔찌를 찰 수도 있겠는데? 무슨 방송사 촬영도 아니고…….”
우주와 남열이는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실험이라며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십여 분의 숙고가 있은 뒤,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기본 기조는 아랬다. 대상을 선정하고 각자 수업이 없는 시간 동안 틈틈이 대상을 지켜볼 것.
“대상을 누구로 하지?”
있을 리 없는 커피 잔의 벽을 혀로 훑으며 남열이가 말했다. 둘 다 귀찮은지 대안을 찾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누구를 선정해서 실험을 할 것인지의 물음에, 우주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 사람 어때?”
“아냐, 너무 튀는데.”
“저 사람은?”
“보고서가 루즈해 질 것 같아.”
“그럼 저 사람. 이제 못 찾을 것 같아. 그만해.”
“안 돼. 너무 평범해 보여.”
“야. 우리가 찾는 표본이 평범한 사람이잖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어쩐지 우울하게 보였다. FreeHug 이벤트장소를 무표정하게 벗어나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어긋남 없이 빼곡히 박혀 있는 보도블록에 꽂혀있었다. 처음 보는 우리의 눈에도 인간관계가 그닥 원만하지 않을 것이며,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동의하게 만드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보고서에 썩 걸맞은 인물로 보였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표본A로 정하고 2주 동안 매일 살펴보기로 했다. 다들 강의를 몇 개 듣지 않는 4학년이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벽면 거울을 빤하니 쳐다본다. 대충 바른 로션이 피부에 뽈록 솟아난 잡티를 가려주기는 하는지, 머리카락의 방향이 가지런한지 손을 거둘 수가 없다. 1층 벨이 울리는 순간 문이 열리고 나는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수업을 빼고 면접에 가는 날이다. 면접을 간 다고 말씀은 드려 놨는데, 결석 체크 되면 어떻게 하려나, 공결은 그렇다고 쳐도 면접에서 떨기만 하다 나오면 볼만 하겠지. 요즘은 불안한 마음의 연속이다.
버스에 탔다. 초조한 마음에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다 취소 버튼을 누른다. 이 녀석도 요즘 면접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다. 그러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걷는 양복장이들과 유모차를 끌고 함께 걷는 두 명의 엄마, 토요일 이른 하교를 하는 초등학생들, 그리고 휴대폰을 붙잡고 서 있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저마다 제 자리에 서거나 걷고 있다.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그 와중에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어깨 아래에 닿는 긴 머리카락. 눈에 담아 둔 익숙한 옷, 두꺼운 전공 책, 그 사람이다. 여자와는 매일 아침 학교 가는 버스에서 마주친다. 한두 번 마주치고 말 요량이면 그저 예쁘다고 생각하고 말겠지만, 매일 보는 이 여자에게는 뭔가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잘 갖춰 입는 패션 센스에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외모,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은 ‘다가오지 마세요’ 라는 의지가 말없이 느껴진다. 그런 여자에 비해 나는 허름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다. 멋들어진 크로스백 보다는 생수병이 옆에 달린 배불뚝이 백팩, 굽이 높은 구두 보다는 끝이 잘 묶여있지 않은 운동화, 무채색의 검은 옷 그런 것들이 나를 대변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감히 말을 걸어 볼 용기도 내지 못하거니와. 단지 가까운 곳에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지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오늘의 나는 면접장 옷차림이라 애써 꾸며 보았지만, 역시나 말을 걸어 볼 마음은 나지 않는다. 바쁨과 심란한 상태만이 함께 버스에 타고 있다. 나는 애써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20분이 지났고,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나는 면접실 앞에 다다라 있다. 앞서 온 면접자들은 좁고 너른 이마에 ‘나 잔뜩 긴장 했소’ 라고 써 붙인 뒤 가지런히 앉아 있다. 그들의 목에 달린 긴장된 표정의 사진과, 큼지막한 번호가 인쇄된 태그만이 각각의 그를 대변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나도 그럴까. 내 번호를 확인하고 그들 사이에 끼려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별안간 인사를 해왔다.
“김다정씨,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오셨나 봐요?”
“저번 ××기업 면접 때 봤었죠? 반가워요.”
“오랜만이네. 야, 다정아. 준비 잘 했어?”
인사와 함께 말을 걸어오는 그들 모두가 생경한 사람들이다. 저 여자, 면접 때 봤었다고? 저번에 다른 면접이 있긴 했는데, 그때 봤던 얼굴인가? 아니, 그때 저 얼굴은 없었다. 친구처럼 말을 걸어오는 저 사람도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아니,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동창인가, 만약 그랬다면 얼굴이 너무 변해서 알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하지……. 아는 척을 해 볼까? 그랬다가 무안을 당하면 어쩌지?
“에에, 그래요. 반가워요. 반가워. 그래. 오랜만이야.”
어정쩡하게 틈바구니 속에 끼어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준비서류를 되 챙겨 볼 뿐 별다른 말을 걸어오지는 않는다. 그럴 리 없겠지만 면접관들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준비한 것에 비해 썩 잘 본 면접이긴 하다. 면접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어땠어?”
“그냥 그랬어. 짧게 인사하는 척 하고 말더라.”
우주는 정장이 불편한 듯 셔츠의 단추를 한 개 풀면서 말했다. 면접장의 다른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우리 예상대로 보다 깊은 대화 없이는 그 ‘친해 진다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강도가 좀 약했다.
대학 동기 둘과 술집에 왔다. 둘은 이미 면접에 합격해서 각각의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학교 출석부에는 이름만 달아 놓고, 교수님께 잘 봐달라고 어떤 로비를 했느니 어쩌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와중에 그들은 진심어린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그 보다는 직장에 안착한 여유 있는 얼굴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면접 노하우를 몇 건 듣다가 화장실에 간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은데 아랫배에서 바로 통신이 온다. 쏴- 배출을 하는데 옆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해온다.
“다정씨, 안녕하세요. 여기 맥주 맛 괜찮죠? 저도 여긴 자주 들러요. 이따금씩 뵙네요.”
“아, 예에.”
옆을 쳐다보는 건 민망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다. 분명 모르는 얼굴이지만 생각을 해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인상이다. 학교에서 봤던가……? 세면대에서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고 그는 손을 씻은 뒤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얼빠진 나만 화장실에 남았다. 자리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말한다. 면접장에서의 일과, 화장실에서의 일. 그들은 믿지 않는다.
“에이, 아는 사람이겠지. 설마 니가 모르는 사람이래도, 모르는 척을 한다면 그건 실례야.”
“아냐 짜식아, 진짜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한 거면 자기만 멋쩍어지잖아. 그건 그렇고 한잔 더 해. 들이 붜. 다정이의 취업을 위해!”
오늘의 작전은 정말 예상 외의 장소에서 일어났다. 남열이와 우주와 함께 술을 마시러 왔는데 문제의 표본A가 가게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알아볼세라 우주는 그들이 앉은 테이블과 등을 보며 앉았고,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한 잔 마신 남열이가 별안간 자신이 나서보겠다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표본A가 화장실로 향하자 기어코 따라갔다. 결과는 처참했다. 술기운 때문에 애초에 생각했던 말을 시원스럽게 말 붙이지 못했다는 것……. 남열이가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성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개강한 지 보름이 되었는데도 이런 저런 바쁜 일로 인해 처음 강의에 들어간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와 있던 학생들이 아는 체를 해온다. 분명 아는 후배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한 결 같이 내게 인사를 하고 근황을 묻는다.
“오빠, 저번에 밥 사주신다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랬나?”
짙은 화장에 멀리까지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학생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걸어온다. 나는 당장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대충 둘러댄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같은 학번의 동기에게 묻는다.
“너, 쟤 아냐? 난 쟤한테 밥 사준다고 한 적도 없고, 누군지조차 모르겠는데.”
“2학년 서은주아냐. 나 니가 저번에 밥 사준다고 한 거 봤는데. 기억 안 나?”
그는 나몰라 하는 나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 정말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뭐 먹고 싶어? 언제 맛있는 거 사줄게.”
“에이, 언제가 뭐에요. 언제가. 며칠 몇 시에 사준다고 약속하세요.”
“그, 그래.”
무책임하게 약속을 한다. 밥을 사준다고 해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 수업에 학생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이런 식으로 실험을 지속하다가는 음료수 값으로 허리가 다 휘어버릴 지경이다. 주연급인 서은주 학생에게는 문화상품권까지 쥐어주었다. 연기력은 꽤 봐 줄만 했지만, 여전히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다. 라고, 우주가 내게 쪽지를 전해준다……. 실망적이다. 서은주 학생과 표본A가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정신과의원 대기실에서 접수를 마친 뒤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간호사는 내게 아는 체를 해 오지 않는다. 나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하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안면을 트지 않은 아파트 경비원, 몇 번 가지 않은 동네 슈퍼 아주머니, 평소에 인사 한마디 서로 건네지 않은 버스기사아저씨-마다 내게 아는 체를 해오니, 도무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취업 때문에 압박을 받는데,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라도 최근에 들러붙은 것인지……. 지금 나는 초조함에 가득 차, 진료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다정 환자분, 아니, 김다정? ××초등학교 나온 김다정 맞아요?”
“네, 그런데요.”
“나 미정이야. 윤미정. 기억 안 나? 4학년 3반의 윤미정. 우리 짝꿍도 했었잖아.”
“아, 아, 알 것 같아. 반가워. 여기서 일하고 있었구나. 예뻐져서 얼굴도 못 알아보겠더라.”
물론 나는 이 여자를 알지 못한다. 다만 출신 초등학교와 학년 반을 입에 담자, 절로 따라서 아는 체를 해야 했다. 윤미정? 이 이름이 앨범에 있었나? 나는 고향 집에 내려가면 꼭 앨범을 확인할 것을 메모한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애꿎은 긴장감이 둘 사이에 오간다. 아니, 내 쪽 뿐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이름이 누구 누구였는지는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 모두 짬뽕되어 있다.
“여기 연락처 줄게.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네. 아, 들어오라셔.”
의사와 만나고 최근의 현상들을 모두 토로한다. 그는 주의 깊게 듣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한마디 꺼낸다.
“다정씨, 혹시 김 아무개를 알아요? 제 대학 친군데 말이죠. 이따금 만날 때마다 조카 이야기를 가끔씩 했거든요. 흔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제 외삼촌이 맞는데요. 아, 그러셨어요…….”
그는 내게 ‘물론’ 아는 체를 해왔다. 그러고는 취업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했다. 약을 처방해 주긴 했는데, 도무지 그게 무슨 약인지 알 길이 없었다. 먹으면 다소 나을 거라고. 나는 지금 약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화장실에 다녀와 밑을 씻지 않은 기분이 하루 종일 지속된다고나 할까. 나는 또 한 번의 불쾌감을 느끼며 병원을 나선다. 살면서 무슨 일을 하고 사는 지도 모르는 외삼촌과 그냥 한번 찾아가 본 병원의 의사가 아는 사이일 확률은 도대체 몇 퍼센트가 되는 걸까. 나는 또다시 드는 의구심에 외삼촌에게 이 정신과의 의사 아무개를 아냐고 물어볼 것을 메모하지만, 그걸 막상 언제 실행할 지는 기약할 수 없다. 나는 늘 잘 잊어버린다.
확실히 의사를 섭외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그는 내내 곤란하다고 말했지만 가까스로 설득해냈다. 그가 병원을 나서면 곧바로 그에게 설명을 해주고 끝내겠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나는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로 분해서 대기실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간호사는 우리가 섭외한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연찮게도 간호사와 표본A는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친구가 맞는 거라면, 그렇게 대승적으로 본다면 우리 취지에 부합한 게 아닌가. 나는 이쯤에서 실험을 접어도 되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일 학교에 가면 팀원들에게 실험 종료를 말할 생각이다.
면접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학교에 간다. 오늘도 823번 등교 버스에서 그 여자와 마주친다. 여전히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있는데 어느 학과에 다니는 학생인지는 알 수 없다. 보통은 책의 옆면에 학번과 이름을 쓰고 다니기는 하던데……. 여자에게 가는 호기심을 지울 길 없다. 나는 이따금 그 여자가 아는 사람이었으면, 뭔가 말을 걸 건덕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최근에 악몽과도 같은 사건들이 이어졌지만, 저 여자가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러나 영영 저 여학생이 내게 말을 걸어 올 일은 요원해 보인다.
버스의 바퀴 위쪽에 있는 자리는 나 같은 학생에게는 편한 자리다. 높은 발판으로 인해 무릎이 쪼그러 드는데, 등에 맨 가방을 무릎 위에 얹고 가기에는 다른 자리보다 유독 편하다. 시내에 이르러 창가에 앉은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자리를 피해준 뒤, 다른 사람이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창가의 자리로 붙어 앉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내가 평소에 힐끔힐끔 바라만 보던 여자가 옆에 앉는 것이며, 게다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에, 예에.”
“혹시 ××대학교 다니세요?”
“예, 그런데요.”
“아, 그렇구나. 같은 학교네요. 저는, 성소연이라고 해요.”
나는 차라리 이 여학생이 나에게 별다른 말을 걸어주지 않기를 바란다. 요즘 있었던 일에 더해 내가 동경하는 이 여학생까지 피상적인 관심으로 나를 대한다면 지금 이 곳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혹시 휴대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저, 이거 굉장히 용기를 내 본 거예요.”
“죄송한데요, 전 그냥 조용히 가고 싶네요.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아서.”
입이 웬수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퉁명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 여자도 아는 체를 해 온 뒤 그 이상의 자세한 대화나 관심과 얘기는 생략해버린 채, 내가 모르는 그런 그들만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 아닐까. 여자는 내 말을 듣더니 별안간 안색을 붉힌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걸지 않는다. 학교에 도착하고 여자가 내린다. 빈자리를 보니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내게 진정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전에 내게 말을 걸어주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짧고 피상적인 관심이 아닌 것이었을까. 내가 내어주었던 그들의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에 다시 저 여자를 만난다면,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두 정거장이 지나쳐 있었다. 부단히 걸어야 할 듯하다.
아, 일이 꼬여버렸네. 이걸 어떻게 한다. 우주나 남열이를 만나면 상의를 해야 할까……. 나는 버스에서 표본A와 어떤 여자의 실랑이를 보고 말았다. 이걸 앞서 있었던 면접장, 술집, 길거리, 학교, 병원에서의 일들과 마찬가지로 보고서에 올려야 하나. 나는 버스 맨 뒷자리에서 앞쪽의 냉랭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약간의 죄의식과 함께. 내가 여자의 뒤를 따라 내릴 때까지 그는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 내릴 생각을 않는다. 따질 겨를도 없이 학교에 도착한 나는 모의 작당한 친구 둘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버스에서 있었던 일을 본 그대로 말했다.
“우주야, 너 혹시 오늘 버스에서 어떤 여학생 섭외했었냐?”
“아니. 그런 적 없는데.”
“남열아, 니가 그랬냐?”
“아니. 보고서용이라면 지금까지 수집한 사례로 충분하지 않나. 실험한 결과 표본A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받을 거라고 예상되는 성적은 C혹은D 라고.”
아 제발……. 너희들이 그랬다고 하는 답변을 원했는데……. 둘 다 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면접장의 면접자로 분한 우주와 술집 화장실 남으로 분한 남열, 어렵게 이뤄낸 지난 2주간의 실험들이 스쳐지나갔다. 제일 힘들기도 했던, 우연찮게 얻어낸 표본A의 외삼촌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까지. 우리는 정말 집요하게 A의 뒤를 밟았었다. 충분히 범죄적으로 오인될 수 있을 만큼.
“정말 그랬다면, 우리가 그 사람의 사생활을 심하게 침해한 거잖아.”
“지금까진 안 그랬냐. 우리가 한 사실로만 해도 일종의 범죄야. 사생활 침해라고.”
“나중에 모든 과정을 설명하고, 롤 케잌이라도 갖다 주면서 싹싹 빌기로 했잖아.”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차원을 벗어난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할래. 아……. 진짜.”
뿌린 자가 거둔 다고 하지 않았나. 나를 비롯한 우주와 남열은 고작 레포트 하나 때문에 은팔찌를 차는 것은 결단코 원하지 않았다. 모두가 음울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고 있을 즈음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냥……. 싹싹 빌어 보는 거지 뭐…….”
나는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 학교 식당으로 향하려던 나를 잡아끌어 카페 안에 들여놓을 때까지 나는 무슨 영문으로 이러는지 까마득히 몰랐다. 이제 그들은 지금까지 내게 벌어졌다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 이야기 한다. 그들은 말끝마다 ‘같은 학생이잖아요’를 들먹이며 난처한 얼굴을 한다. 이제까지 나는 표본A라는 실험 대상이었으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그때만큼은 아는 사람으로 변했었다고……. 애써 기억을 해 보니 이 여자는 면접장에서 봤던 얼굴이고, 남자 또한 술집 화장실에서 본 적이 있다. 강민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도 병원에서 본 적이 있다. 이제야 그들이 하는 말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웃어야 할지, 우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화를 낼 기운도 나지 않는다. 용서해줄 거라고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말을 꺼낸다.
“고마워요.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차암…….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마지막에, 버스 안에서 만났던 여학생은 저희가 섭외를 한 게 아니거든요……. 저기 여기 있는 강민이가 직접 봤다고 그러는데, 정말 다정씨에게 관심 있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우리는 그때 표본A, 아니 김다정의 온갖 심사가 하나의 표정으로 압축되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얼굴은 용서로부터 오는 편안함과 지금까지 앓아온 스트레스로 인한 해방, 그리고 우리가 언급했던 버스에서의 사건으로부터 오는 회한과 자책이 뒤엉켜 있는 형상이었다. 우리 셋은 카페를 나올 때까지 그의 심사를 긁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고, 약간의 먹을거리와 문화상품권을 두고 카페를 나왔다. 안심하지 못한 우주가 ‘이 건으로 인해 우리들을 고소 고발하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받고 싶어 했지만, 남열이와 나는 가까스로 그의 입을 막고 얼버무렸었다. 정말, 그때는 큰일 날 뻔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
소셜네트워크라는 말도 안 되는 실험이 끝난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고, 나는 823번 버스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보고서 말미에, 그 남자의 일상이 어떻게 변했더라, 라는 한 줄의 내용은 적어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고마운 김다정씨는 뒷좌석에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가 제일 선호하는 버스의 바퀴 윗부분에 앉아있었고, 언제나처럼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다정씨가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멈춰 섰고, 승객을 다시 태웠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개중에는 다정씨와 썸씽(?)이 있을 뻔 했던 그 여자 또한 버스카드를 찍으며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아니 표본A쪽으로 다가온다…….
“저기, 소연씨.”
우리의 다정씨가 용기를 내어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다정씨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여자가 그곳에 앉게 했다. 여자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조근조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 원초적으로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을 찾아 그의 일상을 바꿔보는 걸 목적으로 했지만, 영 핀트가 엇나가버린 것 같았다. 지금 보는 표본A 김다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용기 있게 ‘사람’에 말을 걸고 가까이 갈 수 있는…….
괜히 한 사람의 일상을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모두가 아는 사이 라는 말. 그 메시지는 버릴 수 없는 무엇이라고 생각이 든다. 모두가, 모두가 아는 사이라면, 그게 진짜로 현실에 내려와 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바람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아는 사이가 아닐까. 말 한마디만 건네면 진심으로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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