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연덕(환경도시공학 석사과정·10)
6년 가까이 정든 학교생활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 참 감사한 선물을 받게 되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마음속에 있는 단풍빛깔 책장 앞을 서성이지만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 제목을 변용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잘 아는 학자는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부분이 프레데터가 뭔가 말을 하려는 장면이고, 비슷한 뉘앙스를 가진 제목이 떠올라 변용하였습니다.
문학은 그 작품으로만 얘기해야 한다지만 굳이 담고자 했던 마음을 표현하자면 공감을 하고 위로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받고 싶었다는 생각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가항력적인 부조리와 시련을 마주하는 것은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일이며,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흔히 절대자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절대자라는 것은 사람마다 제 각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 절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믿음이 투사된 존재이니까요. 이 이야기는 삶이 주는 시련 때문에 마음속의 도덕적 상징을 상실해가는 인간이 다시 그것을 상기하고 자신의 내면에게 해답을 묻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답은 사실 저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작중의 주인공은 아마 지금쯤은 그 답을 들었겠거니 생각할 뿐이지요.
아직 소설이나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 나름대로의 정의가 확실하게 내려지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글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제가 쓴 글이 소설이라는 문학의 범주에 온전히 포함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많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뼈대를 잡을 수 없어서 기성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는 구성적인 요소를 특히 눈여겨보고자 했고, 시제가 오락가락하는 증상에 주의했는데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기성작가들을 따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어떤 한계에 가두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유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적당히 그렇게 합리화시켜 봅니다.
특출한 재주는 없지만, 기억을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가 선사하는 공감과 치유의 감정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대책 없이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고 돌아보며 누군가와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공유하는 것은 아픔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을 낳는 게 아닌가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눈부신 희망보다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괜찮다” 고 말해주는 글을 써나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님과 충북대 신문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신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