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신문방송사 충북대신문 The Chungbuk Times 교육방송국
전체기사종합취업대학사회광장사람특집문화동영상뉴스포토학술현상공모전문학
최종편집 : 2023.11.27 월 18:07
특집
특집 섹션
확대축소프린트
 이서영
피로 물들었던 한반도의 잊을 수 없는 기억, 6.25 전쟁
제 974 호    발행일 : 2023.06.05 
1.jpg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38선을 넘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3년 후에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는 급작스러운 북한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내려온 북한은 침공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쪽으로 진군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참전으로 반격을 시작한 국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을 지나 압록강까지 진격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기존의 38선 부근까지 후퇴한 후 일진일퇴의 치열한 소모전이 시작된다. 이 상황에서 1951년 7월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고, 2년여의 지루한 협상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대한민국 정부의 참여 없이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서명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상태

  전쟁을 치르며 군사적으로 대립한 국가나 집단이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맺는 협정은 ‘평화협정’이다. 그런데 6.25 전쟁은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으로 끝을 냈다. 정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멈추는 것으로 상호 적대행위는 중지하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 휴전상태다.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한 사이에는 38선 대신 휴전선이 생기고, 휴전선을 중심으로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생겼다. 또한 정전협정 준수와 적대행위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UN군과 북한군이 참여하는 ‘군사정전위원회’가 판문점에 설치되었으며,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금지하고 감시하기 위해 ▲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가 참여한 ‘중립국감시위원회’도 구성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무시한 남북 간의 도발과 충돌은 오랫동안 계속됐고, 냉전체제 속에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는 본연의 역할을 상실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된 탈냉전시대에도 남북한의 대결 구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남북한 단일 스포츠팀 구성, 남북 정상회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구호물자 지원 등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북한은 여전히 평화협정은 고사하고 정치적 선언인 ‘종전선언’조차 하지 못했다.

6.25 전쟁이 남긴 비극

  경상남도 진주시는 6.25 전쟁으로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도시 중 하나다. 그래서 도시 곳곳이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진주시가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한 ‘일호광장’과 그 중심에 있는 ‘옛 진주역’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옛 진주역 입구 왼편에는 열차 시간표와 재현한 과거 매표소가 있고, 전시실에는 삼량진-진주 간 선로가 개통되고 6.25 전쟁을 거쳐 소실된 당시의 사진이 그날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일호광장 뒤편에는 진주역의 차량정비고가 있는데, 1925년 진주역이 들어서면서 기차를 정비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지붕은 뾰족하고 건물 정면 가운데 위에는 둥근 창이 있어 이국적인 외양이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 전쟁 등 90여 년에 이르는 굴곡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차량정비고는 관리가 잘되지 않았음에도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그리고 그 외벽 곳곳에 전쟁 당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호광장에서 철도를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진치령 터널이 나온다. 1925년 만들어진 이 터널에는 6.25 전쟁 중 25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곳이다. 1950년 7월 31일 북한군에 점령된 진주는 UN군의 무차별 폭격 대상이 됐다. 무차별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주시민들은 진치령 터널로 피난했고, 1950년 8월 3일 터널 안 피난민의 밥 짓는 연기를 본 미군 전투기 편대는 터널을 향해 두 차례 기총사격 후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못한 전쟁의 비극이었다.

2.jpg

  2012년 구 경전선이 폐선되며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터널이 된 진치령 터널은 지금은 도시재생 사업을 거쳐 여행 명소로 바뀌었다. 250여 명이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은 시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자전거 도로와 아름다운 갤러리가 있는 복합문화공원으로 변신했다. 이곳이 비극의 현장이라는 짧은 안내문이 있지만, 조명과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테마의 포토존은 이곳의 비극을 잊게 했다. 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상기하고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복합문화공원에서 벗어나 초전공원으로 가면 6.25 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이 추모비는 1950년 7월경 진주에서 학살된 2~3천여 명의 민간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추모비 주변에는 추모 시, 추모비 건립 이유가 새겨진 비석, 그리고 지금까지 파악된 민간인 희생자 292명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함께 세워졌다.
  초전공원의 추모비가 기리는 민간인 희생자들은 ‘보도연맹사건’과 관련이 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인사를 교화하고 전향할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에 근거 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좌익 전향자를 대상으로 연맹원을 모집해야 하지만, 공무원들은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곡식이나 고무신을 나눠주며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가입시켰다. 그 결과 전쟁 직전 보도연맹 가입자 수는 30만 명에 이른다.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불안했던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 초기 후퇴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보도연맹사건은 명백히 국가에 의한 학살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6.25 전쟁의 비극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는 6.25 전쟁의 사료를 쓴다는 심정으로 6.25 참전 유공자회 청주시지회 박성규 회장을 만나 그의 기억을 기록했다.

Q.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회장님의 상황을 듣고 싶어요.
  제가 6.25 전쟁을 만난 건 17살 때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1학년이겠죠. 저는 당시 청주공업중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는 중학교를 6년 다니던 시절이라 저는 중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돼 나라에 힘도 없었고, 준비된 국방력이 없어 나라가 어지러웠어요. 그래서 군수물자도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6.25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청주는 7월 중순부터 피난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이게 몇 년씩 걸릴 거라고 생각을 안 했고 “잠시 피해만 있으면 될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어른들이 얘기해서 저희도 피난 대열에 합류했어요. 그렇게 자전거에 쌀,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걷고 걸어서 대구까지 갔습니다.

Q. 말씀을 들으니 아직 미성년자셨는데 어떻게 참전하셨어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피난민들로 꽉 차서 혼란하던 대구까지 가서 쌀은 다 떨어지고, 밥을 얻어먹을 곳도 없고, 여기저기 동냥하다시피 연명했는데 당시 대구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군인을 모집하는 걸 보고 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박성규가 아니었어요. 기노시다 히로나라, 그게 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다 10살 무렵 해방되면서 되찾은 이름이 박성규예요. 이때 당시 선생님들은 굉장히 애국심도 강하셨고 충효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셔서 덕분에 저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죠. 그래서 그때 당시 학도병으로 입대한 사람만 5만여 명이 넘었는데, 저도 청주에서부터 같이 온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하면서 그중의 한 명이 됐어요. 근데 그때는 학생이라서 정식 군인이 아니라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됐죠. 지원서에 이름, 본적, 생년월일, 부모가 누구인지, 연락처 등 이것저것 작성하고 사인해서 학도 의용군이 됐어요. 3일째 훈련하던 날 휴식 시간에 누가 권총을 이렇게 차고 와서는 “너, 너, 너” 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지명이 돼서 따라간 곳이 1사단 12연대였고, 사단 병력으로 편입했습니다. 학도병이니까 학생 모자를 쓰고 남루한 운동화를 신고 있던 나를 보더니 선배들이 고생할 거라며 아버지, 어머니랑 연락은 하고 떠났느냐 하면서 걱정해주던 기억이 있네요.

Q. 3년이라는 긴 전쟁에서 많은 일을 겪으셨을 것 같은데,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많은 일이 있었죠. 6.25 전쟁 당시 각 지역에서 많은 전투가 있었거든요. 엄청 많은 장소에서 몇만 명, 몇십만 명씩 죽었어요. 피나는 격전을 치른 데도 엄청 많죠.
  당시 시계도 없어서 몇 시인지도 모르고 땅을 파고 개인 참호에 들어가 있던 중, 갑자기 수류탄이 터지고 인민군이 넘어 들어왔어요. 저는 그때 참호에서 엉덩이는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도 모르고 땅에 머리를 처박고는 나오지 않았죠. 그렇게 2~3시간 정도 벌어진 전투에서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숨어만 있었어요. 인민군이 저를 못 봐서 그냥 넘어갔는데 끝난 다음에 나와보니까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땅이 온통 피로 젖어있었어요. 시체를 옮기고 또 옮기고 장례도 치르고, 눈물이 나올 것 같더라고요. 첫 전투는 이렇게 지나가고 저는 9번의 전투를 더 치렀습니다.
  야포 소리, 박격포 소리, 비행기 폭격 소리, 탱크가 왕왕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싸우면서 제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눈을 감겨준 사람들만 40~50명이 넘어요. 이름도 잘 모르고 이 군, 박 군하고 불렀지만, 같이 고생한 세월이 얼만지 눈물이 많이도 흐르더라고요.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그러죠. 시체는 산처럼 쌓이고 피는 바다같이 흘러내리는 그런 전투를 계속해서 겪다 보니까 그제야 국가가 뭐고 나라가 약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겠더라고요.
  한참 후에는 우리가 평양을 지나 압록강까지 밀고 갈 정도로 전세가 호전됐습니다. 그때 학도병 중 남을 사람은 남고 학교로 복귀하라고 ‘학교 교육령’이라는 게 떨어졌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로 가겠다며 돌아갔어요. 그러던 중 중공군이 몰려와 차편도 없어 거기서부터 걸어서 청주까지 들어온 것이 1950년 11월 31일이에요. 이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됐지만 제가 직접 겪은 것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Q. 사람들이 ‘이것만은 기억해줬으면’ 하는 게 있으신가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겁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하신 말씀이죠. 저는 그래서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하고 있어요. 가슴 아픈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힘 있는 국가는 역사의 주인이 되고 힘없는 국가는 역사의 제물이 된다"라고 이야기해요. 얼마 안 있으면 전쟁에서 직접 싸웠던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나고 없을 거예요. 그 전에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역사를 알면 ‘이런 슬픔이 있었고 이런 악재 속에서도 견뎌낸 꿋꿋한 민족이다.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인정받는 그런 국민으로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잖아요. 현재에만 신경을 쏟을 게 아니라 과거도 함께 생각하면서 미래를 살아갈 계획을 하는, 이렇게 삼박자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군인들만 싸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그분들이 여러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절대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라는 거, 그것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념의 대립으로 한민족이 싸워야 했던 가슴 아픈 과거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73주년이 됐다. 시간의 힘 아래 서서히 나이 들고 잊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분들을 기억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하신,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또한 좌우의 대립 속에 희생된 무고한 이들의 죽음도 잊지 말자. 과거를 기억 못 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또 다른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서영 기자 
2seoy0@chungbuk.ac.kr
Name Pass  

목록보기
최근기사
글로컬대학30 사업 선정...
2024년을 새롭게 열 ‘개화’ 선본 제56대 ...
2024년 우리 학교를 이끌어 갈 제56대 총학...
우리 학교의 요리왕은 누구일까? 장쿱이의 꿈
우왕이와 찰칵, 생협 포토쿱 설치
특집 More
충북대신문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글로컬대학 30 충북대-교통대 통합 논란> 지난달 5일 ...
<글로컬대학 30 충북대-교통대 통합 논란> 중앙운영위원...
<글로컬대학 30 충북대-교통대 통합 논란> ‘학생 의견 ...
<글로컬대학 30 충북대-교통대 통합 논란> 글로컬대학 3...
전체기사 종합
취업
대학
사회
광장
사람
특집
문화
동영상뉴스
포토
학술
현상공모전
문학
동영상뉴스
수습기자모집
PDF자료실
지난호보기
신문사 소개 기사제보 독자참여 개인정보 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

28644 충북 청주시 서원구 충대로1, 충북대학교 신문방송사(발행인 : 고창섭 | 주간 : 구본상)

행정실 : 043-261-2934    충북대신문 : 043-261-2936    The Chungbuk Times : 043-261-2935    교육방송국 : 043-261-2953

Copyright ⓒ 2008 충북대학교 신문방송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