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4·3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라고 정의한다. 제주도민들은 7년 7개월 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무장대와 경찰과 군인들로 구성된 토벌대 사이에서 영문도 모른 채 무고하게 희생당해야만 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4년 현재 14,822명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충북대신문>은 제주도에서 김명원(제주도 서귀포시·93) 씨와 오순명(제주도 서귀포시·82) 씨를 만나 비극적인 제주의 4월에 대해 들었다.
“우리가 죽어도 당신은 살아야지. 그래야 당신이 우리 시신이라도 찾아줄 것 아니냐”
1933년 남제주군 남원면 수망리(현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태어난 김명원 씨는 16세에 4·3을 겪은 생존 희생자이다. 1948년 9월쯤, 하루는 총소리가 ‘뻥’하고 났다. 어렸을 때라, 총소리라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어 무슨 소리인지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방에 가만히 있어라” 하시고는 집 주변에 있던 대나무밭으로 숨었다. 10분 있다가 누군가 방문을 발로 찼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다 부서지고,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총을 들이밀며 손을 들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온 집안을 다 뒤집어가며 뒤졌다. 아버지가 없으니 따라 나오라고 했다.
“집 밖으로 한 150m쯤 따라갔더니 잔디밭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있더라고요. 아까 들렸던 총소리는 사람을 쏘는 소리였어요. 그 쓰러진 사람 옆으로 오라고 하니 따라갔어요. 거기 꿇어앉으래요. 꿇어앉고 보니 무릎 밑 잔디밭이 온통 피로 물들어있더라고요. 근데 쓰러진 사람을 딱 보니까 국민학교 동창생이었어요. 아침에 나와서 운동을 하다가 경찰이 총을 쏘니 도망을 간 거예요. 도망간다고 그대로 쏴버린 거죠. 그 옆에 꿇어앉으니까 제 무르팍을 군화발로 밟더라고요. 그래서 아프다고 옆으로 쓰러지니까 엄살 부린다며 제 팔을 꽉 잡아 당겼어요. 어찌나 세게 당겼는지 팔이 빠졌어요. 그래서 손을 들라는데 한쪽 팔밖에 못 들겠더라고요. 빠진 쪽 팔을 엉성하게 들었더니 저한테 총을 쐈어요. 전 그 자리에서 기절했어요. 좀 있으니 정신이 돌아왔는데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팔을 걷어보니 총알이 스쳐 갔더라고요.”
그날 그는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3일 후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은 가족은 산으로 피신했고, 수망리와 근처 마을의 집은 모두 불탔다. 해가 지고 돌아온 집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외양간에 있던 소는 도망가 버렸고, 곡식더미가 있던 곳은 재가 돼 있었다. 얼마 뒤 토벌대가 습격하던 날 그의 아버지는 9살, 12살 동생들을 안고 업고 달렸으며,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는 3살 난 여동생을 안고 뛰었다. 김명원 씨는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 했지만, 경찰이 그에게 총을 겨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픈 동생을 뒤로한 채 담을 넘어 도망쳤다. 한참이 지나 돌아와 보니 동생은 죽창에 찔려 죽어있었다. 아픈 아이가 울기만 한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동생 한 명을 잃었다.
이후 김명원 씨의 아버지는 마을에 남고, 남은 가족은 외가로 몸을 피했다. 외할머니는 출산 시기가 가까워져 온 어머니를 위해 창고에 굴을 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보이지 않았다. 아이 울음소리가 나면 들킬까 염려한 것이다. 외가에 온 지 5일 쯤, 어머니는 그 굴에서 순산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핏덩이를 안고 다시 산을 올라야 했다. 당시 중산간 지대 마을은 ‘빨갱이 소굴’로 여겨지며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서북청년단 단원이 외숙모에게 “여기 산 사람들 데려왔다면서요”라며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단원은 외숙모와 친분이 있었기에 모른 척 돌아갔지만, “알려지면 다 죽는다”라는 말에 겁이 난 가족은 결국 다시 수망리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더는 머물 수 없었다.
“토벌대가 날만 새면 총을 쏘면서 들이닥치더라고요. 결국 다섯 가구가 모여서, 평지는 눈이 너무 많이 오니 더 깊은 밀림 지대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양식도 없고. 근데 밀림 지대에 들어가서 이틀을 지내니까 계속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울죠. 그래서 아버지가 하루는 그 다섯 가구의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이대로는 안 된다. 오늘 저녁에 눈이 많이 올 것 같으니, 집에 가 고구마라도 챙겨오자. 우리가 오는 길에 눈이 오면 발자취가 사라질 거다” 하시고, 그날 밤 수망리로 내려가셨어요. 제주도는 겨울을 앞두고 밭에 구덩이를 깊게 파서 그 안에 고구마를 저장해두거든요. 그래서 다른 식량은 다 불탔지만, 고구마는 살아남았죠.”
“그런데 고구마를 짊어지고 오는 길에 눈이 그친 거예요. 그 발자국을 따라왔는지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아버지가 돌아와서 고구마 짐을 내려놓고 한 10분 있으니, 근처에서 막 고함이 들려요. 아버지가 뛰어나가려다가 움직이질 못하고 주저앉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우리가 죽어도 당신은 살아야지. 그래야 당신이 우리 시신이라도 찾아줄 것 아니냐”면서 얼른 나가서 도망치라고 아버지 등을 떠밀었어요.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서 10m쯤 가시더니 탁 쓰러지셨어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고요. 우리가 있던 밀림 지대에 다섯 가구가 있었는데, 고구마 가지러 갔던 가장들만 다 죽었어요.”
“그러고 나서 군인이 우리 보고 나오래요. 그 20여 명쯤 되는 사람이 그 군인들을 따라서 의귀국민학교로 가게 됐어요. 학교 바로 옆에 큰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그 넓은 창고에 이미 한 4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어린 학생과 아이들, 아니면 나이 많은 노인들만 앉아 있었어요. 다 아는 사람들이었죠. 그날 밤엔 군인들이 주는 주먹밥 하나를 받아먹고 그 창고에서 잤어요.”
다음 날 아침, 무장한 군인 5명이 왔다. 어제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한쪽 옆으로 앉으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한쪽 옆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20세부터 50세까지는 다 나오라고 했다. 그중엔 그의 어머니도 있었다. 이 사람들한테 불려 나가면 죽겠구나. 어머니는 그때 눈치를 채셨다. 갓난아기를 안고 나가니까 군인이 아기는 다른 사람 주고 나오라고 했다. “얘는 내가 있어도 죽고 내가 없어도 죽는다. 내가 안고 가서 내 품에서 죽도록 하겠다”라고 하시면서 아이를 안 주려고 하니까 군인이 아기 두 발을 한 손으로 잡아서 거꾸로 들더니 김명원 씨에게 던졌다. 그 핏덩이를 받아 안고, 끌려 나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우시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5분 정도 지나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끌려 나간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다. 16살이었던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 같은 마을 주민이던 남원면장을 만나 고모님 댁으로 보내졌다. 어머니를 잃은 갓난 동생은 배가 고파 자꾸만 울었고, 사흘 뒤 그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이후 어머니의 시신을 찾으러 학교로 갔지만 남아있는 것은 한데 뒤섞여 있는 수많은 백골뿐이었다. 결국 합장묘를 만들었고, 매년 그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는 목동으로 일하며 살아남은 동생들을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신흥리에 경찰 출장소가 하나 있었어요. 하루는 그 출장소에서 나를 찾는대요. 가슴이 덜컹하더라고요. 혹시 또 뭘 잘못했나 해서. 그래서 출장소로 갔더니 여기서 급사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 하셨어요.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 원수 같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일이라니, 그런 일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 싶어서 안 하려고 했어요.” 근데 결국 그는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 4·3생존희생자 김명원 씨(왼쪽)와 4·3유족 오순명 씨(오른쪽)
“너희 부모는 폭도로 죽었다. 그래서 불합격이다”
4·3 당시 5살이던 오순명 씨는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당시 오순명 씨의 아버지는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 정방폭포 부근 공장에 수감됐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던 중 총살당했다. 끌려갔던 아버지는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된 뒤 폭포수와 함께 추락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를 따라 벌초하러 갔다. 묘 하나만 벌초했는데 할머니는 돌아가자고 했다. “왜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해야죠”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야단을 쳤다. 부모님은 두 분인데 왜 하나만 벌초하는지, 왜 혼나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15일 만에 돌아가셔서 한 무덤에 두 분을 다 묻어드린 걸 나중에야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버이날을 앞두고 학교 미술 시간에 어머니 아버지 얼굴을 그리라고 했어요. 근데 저는 기억이 안 나서 어머니 아버지 얼굴을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왜 아무것도 안 그리냐”라며 선생님이 저를 막 혼내는 거예요. 너무 서러워서 며칠 동안 학교를 안 간 적이 있어요.”
4·3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연좌제의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오순명 씨는 교육대학을 졸업했지만, 몇 개월 동안 교사로 근무하지 못했다.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신원조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3에 관한 피해를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교단에 설 수 있었다. 결국 그는 교장으로 퇴임하기 이전까지 자신이 4·3 유족이라는 사실을 어디에도 밝히지 못했다. 김명원 씨는 군대에서 간부 후보생으로 지원했지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면접관은 “너희 부모는 폭도로 죽었다. 그래서 불합격이다”라고 말했다.
77년 동안 한 번도 작별한 적 없었다
제주시에는 4·3의 고통을 기록한 제주4.3평화기념관(이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도심에서 한참 차를 운전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데, 해가 들지 않아 유독 쌀쌀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외국에서도 4·3을 주목하고 있음을 방증하듯 기념관에는 많은 외국인이 보였다. 기념관의 초입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 ‘백비’가 누워있다. 백비는 흰 비석이 아니라 빈 비석을 뜻한다.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는 것이다. 4·3은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아직 제대로 된 명칭을 얻지 못했다. 사건의 성격이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지 못한 것이다. 백비를 지나면 해방 이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시작으로 4·3의 역사를 설명한 전시품들이 늘어서 있다. 이어 당시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예술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그중에서도 고길천 작가의 <학살의 유형>이라는 조각 작품은 죽은 아이가 안겨 있는 모습과 몸이 묶인 채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 다양한 학살의 참상을 묘사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조각품의 참혹함이 와 닿았다.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제주4·3평화공원에는 위령탑이 있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수많은 각명비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름의 개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중에는 이름조차 없는 한두 살배기 아이들도 있었다. ‘000의 자(子)’로 이름 붙인 그들의 죽음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행방불명자들의 위령 공간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3,900여 명의 표석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묘조차 만들 수 없었던 수많은 이름이 당시의 절망을 전해줬다.

▲ <학살의 유형> 작품
김명원 씨와 오순명 씨의 당부
김명원 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관련 인터뷰를 했는데 신문에 났다. <작별하지 않는다> 책을 몇 번 읽었다. 이 책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겠다고 대답했었다”라며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뭐 있나.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 이 4·3의 숨결이 역사로 남았으면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갈 젊은 세대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전했다.
오순명 씨는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일하며 생긴 일을 들려줬다. “6년 전에 한 초등학교에 가서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다 하고 마지막에 질문을 받았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저한테 “선생님, 그래서 복수했어요?” 하고 물었다. 다른 학생이 또 일어나서 “선생님, 제가 크면 복수해 줄게요” 하더라. 그때 많은 생각을 했다. 아이들에게 적대감만 심어줬나 싶어 엄청 후회했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참상이 또 다른 참상으로 이어지는 게 두려웠던 그는 “지금은 강의 끝머리에 “이건 역사로 보자. 이 일로 또 이념 대립을 만들지 말자”라는 이야기를 붙인다. 많은 분이 돌아가신 것도 맞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금 젊은 세대도 너무 많이 대립하고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작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과제는 망각에 맞서는 것이며,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념을 앞세운 국가의 폭력에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잊지 말고, 그들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혐오를 부추기며 대립을 조장하는 세력이 우리의 역사에 다시는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시호 기자
2021020009@chungbuk.ac.kr








이시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