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가 단풍으로 붉게 물든 완연한 가을이 왔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사계절 중에서도 가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감은 풍요로움과 쓸쓸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산을 뒤덮는 붉은 빛이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이 때, 삼홍(三紅)과 함께하는 지리산 피아골의 오색단풍에 취해보자.
피아골, 그 곳은 어디?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은 피아골의 가을 풍경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가을의 단풍이 아름답지 않겠냐만, 피아골의 가을은 특별하다. 예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이 자자한 것은 물론이고, 강산이 뒤바뀐 오늘날에도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피아골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것은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원시림의 푸름과 그 속에 담긴 역사의 흔적 때문이다.
피아골. 그 이름 안에 담긴 이야기가 절절하다. 단풍의 붉음이 핏빛과 같다하여 피아골이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곳이라 하여 피아골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의병의 ‘피’요, 가까이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한국전쟁 당시 스러진 영혼들의 ‘피’라는 소리까지. 붉디붉은 단풍 아래 담긴 ‘피’의 사연은 켜켜이 쌓여 산중 피아골에 신비를 더한다. 속내를 들춰보면 우리 선조들이 즐겨 먹던 피(오곡 중 하나)를 많이 심었던 골짜기라 하여 피아골이라 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사연에 귀 기울여지는 것이 인지상정. 자갈길 을 걷다보니 괜스레 스산한 마음이 든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등산로
피아골을 걷다
버스를 타고 직전마을에 도착해 발길을 재촉하면 오른다고 하기엔 너무 완만한 길이 늘어선 피아골이 나타난다. 피아골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동무삼아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으면 사람이 이 길을 걷는 것인지, 길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쉽고 가볍게 태고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선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아버지,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나선 중년의 부부, 다람쥐마냥 신난 아이들. 산의 흥치를 돋우는 계곡의 물줄기와 집채만 한 바위의 웅장함은 단번에 등산객들을 압도한다. 아이들은 차가운 물에 시린 줄도 모르고 단풍잎 같은 손을 계곡에 담근다.
길을 따라 1km정도 걷다 보면 직전삼홍소(稷田三紅沼)를 마주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이를 보고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짝에 들어선 사람들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고 노래했다. 깊이 고인 짙푸른 물빛과 붉은 단풍의 일렁임이 조화를 이루는 삼홍소의 아름다움. 어린아이 손을 닮았던 단풍이 어느새 살아 숨쉬는 수탉의 붉은 볏이 되었다.
능선에서 바라본 지리산 가을 풍경
산 사나이가 말하는 지리산
직전마을로부터 3km 남짓. 느긋하게 걸어도 숨이 차오르는 거리를 걸어야 대피소에 다다른다. 계곡 위에 놓인 다리 건너 피아골 대피소가 눈에 들어온다. 가을 단풍을 보러 온 가족단위 관광객이며,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여러분, 추억은 가슴에 쓰레기는 배낭에. 귀한 산행 되십시오.”
대피소 앞마당, 김종복(52) 지리산 산악구조대장의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다. 그는 70년대 말부터 올해로 32년째 지리산과 함께해온 지리산 터줏대감이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 김종복 대장
-언제부터 산과 함께하게 되었나?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구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저 산이 좋아서 어린 나이에 산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지리산에서 축제를 했던 날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산이 인간에게 전하는 무언의 조언 같은 걸 느꼈다. 그 날 이후로 산과 함께, 대자연의 품에서, 어머니 같은 은혜의 자연을 지키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지리산과 함께한 32년. 김종복 대장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등산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돕는 건 다반사이며,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사고를 당한 사람을 구해낸 것만 대충 헤아려도 250명이 넘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일. 그는 이마저도 자연의 은혜에 대한 갚음일 뿐이라고 한다.
- 피아골 대피소에 사람이 많다.
“단풍이 한창인 가을이 되면 등산객이 많아진다. 대피소는 등산객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사고가 났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있는 곳이다. 때문에 피아골의 경우 매점을 무인판매로 운영한다. 이용객들은 대부분 물건 값을 스스로 놓아두고 간다. 종종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져온 식량을 두고 가거나 편지를 남기기도 한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쉬고 가는 곳. 이곳이 피아골이다.”
인터뷰 중간, 한 소녀가 절뚝거리며 대피소로 들어온다. 마을까지 4km. 발목을 삐끗한 소녀와 가족들은 어떻게 산을 내려가야 할지 한걱정이다. 김종복 대장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정성껏 붕대를 맨다. 괜찮을 거라는 다독임과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 피아골에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산에서 흐르는 물이 계곡을 이루고 큰 강으로 가면, 우리가 마시는 물이 된다. 등산인구가 2000만에 이르렀다. 산이 순간의 유희 장소가 아닌 성스러운 곳이라는 인식이 약한 것 같아 아쉽다. 어른 세대는 삼림욕을 하면서 힘을 얻고, 아이들은 자연을 배우고 교훈을 얻는 장소. 산이 그런 장소로 기억됐으면 한다.”
그는 평생을 무보수로 24시간 지리산을 지킨다. 생필품 하나하나 10리를 걸어 지게로 지어와야 하고, 길을 나설 때마다 쓰레기 봇짐을 짊어져야 하는 삶.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 김종복 대장의 하루는 위대하다.
홍선녀 기자 angelhong@cbnu.ac.kr
김고우 수습기자 rlarhdn66@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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