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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10.19 월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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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훈
성곽 안에서 만난 오늘의 수원화성
제 996 호    발행일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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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장한 성문과 길게 뻗은 성곽, 고즈넉한 행궁을 품은 수원화성. 그 안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 정조대왕의 행렬이 거리를 수놓은 수원화성, 역사와 일상이 나란히 흐르는 수원으로 기행을 떠났다.

두 번의 환승, 만석 버스에서 시작된 축제

  지난 10월 4일 오전 9시 16분, 청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수원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날의 여정은 행궁동 골목과 성곽을 걷고, 화성행궁과 수원화성문화제를 둘러본 뒤 정조대왕 능행차를 관람하는 순서였다. 수원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고 곧바로 화성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마침, 수원화성문화제 시작일이라 버스는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축제의 열기가 전해졌다. 환승은 번거로웠지만, 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화성의 풍경이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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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그해 우리는>을 촬영한 카페.

  행궁동 초입에서는 낯익은 공간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촬영지로 알려진 카페였다. 드라마의 팬인 내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카페 벽에는 등장인물들의 그림도 있었다. 화면으로 보던 주인공의 집을 실제로 마주하니 반가웠다. 화성을 만나러 온 길에서 드라마 속 한 장면까지 마주한 셈이었다. 잠시 카페를 바라본 뒤 골목을 따라 성곽으로 향했다.

돌담 너머, 일상이 흐르는 풍경

  수원화성의 서문인 화서문에서 북문인 장안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은 완만했다. 낮은 구릉을 따라 성벽이 길게 뻗어 있었고, 그 곁에서는 시민들이 산책하거나 풀밭에 앉아 쉬고 있었다. 성곽을 보러 온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서문은 돌로 쌓은 아치형 문 위에 단층 누각이 올라앉아 있었다. 문 바깥을 둥글게 감싼 옹성이 특히 눈길을 끌었고, 가까이에는 서북공심돈이 굳건히 서 있었다. 성벽을 따라 장안문에 이르자 한층 웅장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안문은 높은 돌문 위로 이층 문루가 솟아 있었다. 넓게 펼쳐진 지붕과 처마가 시선을 붙들었다.
  성곽은 바라보는 거리와 방향에 따라 표정을 달리했다. 가까이에서는 성벽을 쌓은 돌의 크기와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을 바라보면 길게 이어진 성벽 안으로 마을의 지붕과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안에는 교회와 카페, 스페인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성곽을 구경하다 스페인 음식점의 간판을 마주하니 뜻밖의 만남에 눈길이 멈췄다. 성벽 안쪽 골목에서는 커피와 피자를 팔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유를 즐겼다. 누군가에게 여행의 목적지인 수원화성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무대였다. 성곽길을 걷는 사람들과 풀밭에서 쉬는 시민들, 돌담 안쪽의 가게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졌다. 성문과 성벽을 살펴보는 사이사이 성안의 골목으로 눈길이 갔다. 화성을 걷는 동안 오래된 돌담의 생김새만큼이나 그 곁을 채우는 일상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정조가 머물던 궁궐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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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행궁의 안뜰

  성곽을 걷던 발걸음은 화성행궁으로 이어졌다. 행궁은 왕이 행차할 때 머물던 임시 궁궐이다. 화성행궁에 들어서자 낮게 펼쳐진 기와지붕 사이로 마당이 열렸고, 마당을 건너면 또 다른 건물과 문이 이어졌다. 건물들은 담장과 문을 사이에 두고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문을 하나씩 지나며 행궁 안쪽으로 발걸음을 들였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방마다 자리를 잡고 쉬는 시민들이었다. 사람들은 처마 아래와 마루 곳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도 비어 있는 방에 잠시 앉아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았다. 처음 품었던, 왕이 머물던 궁궐이라는 무게감이 한결 가벼워졌다. 낮은 건물과 곳곳에 앉아 쉴 자리를 내어주는 행궁은 이제 위엄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각 구역에 놓인 안내문을 읽으며 방의 쓰임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봤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던 건물들도 저마다 다른 쓰임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중 눈길을 끈 곳은 ‘노래당’이었다. 정조가 노년을 보내려 했던 별당인 ‘노래당’의 이름은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으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늙음을 맞이할 공간의 출입문에는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라는 뜻의 ‘난로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니, 두 이름의 대비가 흥미로웠다.
  방과 마당을 차례로 지나 행궁 끝자락에 이르자 숲이 보였다. 기와지붕을 더듬던 시선이 나무로 옮겨갔다. 행궁의 중심 건물인 ‘봉수당’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곳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곳이다. 마당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회갑연이 열리던 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봉수당’ 마당과 담장을 장식한 수원화성문화제의 깃발과 문양은 잘 보존된 궁궐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축제의 장식이 보탠 색과 활기 덕분에 오래전 이곳에서 열렸을 잔치가 한층 생생하게 그려졌다. 눈앞의 마당에 회갑연의 한 장면을 드라마처럼 겹쳐보게 됐다. 이날 마지막으로 관람할 ‘능행차’도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수원으로 향했던 정조의 여정을 재현하는 행사였다. ‘봉수당’을 보고 나니 곧 도착할 행렬이 한결 가깝게 다가왔다.
  행궁을 관람하던 중 담장 밖에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걸 그룹 리센느의 노래였다. 리센느가 전날 공주에서 열린 문화 축제를 방문했던 터라 수원에서도 리센느의 무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노래를 따라가 마주한 무대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로봇이었다. 정조대왕능행차의 도착지인 행궁 광장에서 식전 행사로 로봇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옛 궁궐 앞에서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추는 로봇이라니. 정조대왕 행렬의 마지막 종착지에서 로봇들이 가요에 맞춰 춤추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시민들과 함께 바라본 왕의 행렬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정조대왕 능행차였다.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해 장안문을 거쳐 행궁광장으로 향하는 행렬을 보기 위해 장안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행렬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인파로 빈틈이 없었다. 기자도 그들 사이에 끼어 행렬이 다가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여러 단체가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의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가며 거리를 채웠다. 다음은 사극에서 보던 관아의 관리와 병사들이 줄지어 섰다. 분홍색과 노란색 한복을 입은 궁녀들도 거리를 물들였다. 뒤이어 몸집이 큰 황소가 모습을 드러냈고, 말을 탄 기병들이 줄지어 행렬을 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마차가 지나갈 때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마차 안의 혜경궁 홍씨 대역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인파는 다시 환호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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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왕 능행차.

  정조대왕을 알리는 깃발 뒤로는 아무도 타지 않은 백마가 나타났다. 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자, 시민들은 의아한 듯 주변을 살폈다. 그때 장안문에서 정조대왕 역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시민들의 환호 속에 그가 행렬에 합류했다. 정조대왕 대역은 양쪽 길가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뒤이어 나팔 소리가 울리고 행렬은 행궁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행렬의 바탕은 ‘을묘년 화성원행’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8일간의 여정에 나섰다고 한다. 오늘날의 정조대왕능행차는 당시 행사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바탕으로 재현된다. 그날의 정조대왕도 오늘처럼 많은 사람 사이를 웃으며 거닐었을까. 문득 즐거운 상상이 스쳤다.

  아침 일찍 청주에서 시작한 길은 수원의 골목과 성곽, 행궁과 축제로 이어졌다. 성곽을 따라 걷다 일상을 만났고, 행궁에서는 낮은 처마 아래로 스미는 가을바람을 맞았다. 행궁 앞에서 춤추던 로봇과 장안문을 지나던 왕의 행렬도 떠올랐다. 기와지붕과 돌담 사이로 사람들의 일상과 축제의 활기가 어우러진 풍경, 이날 두 발로 만난 수원화성은 그 모든 장면을 품고 있었다.


김성훈 기자
shk2004policy@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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