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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도연&홍지희
[기획연재 : 라이벌특집2탄] 코코 샤넬 & 엘자 스키아파렐리
제 861 호    발행일 : 2013.04.15 


 
  두 개의 C가 교차하고 있는 샤넬의 로고는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익숙한 로고일 것이다. 이 로고는 샤넬의 창시자이자 디자이너인 ‘코코 샤넬(Coco chanel)’의 이름에서 탄생했는데, 그는 현재까지도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브랜드 ‘샤넬’을 완성시킨 장본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자이너다.
  하지만 그가 모두에게 촉망받는 디자이너가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로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그는 고아원에 보내진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 그는 가수를 꿈꾸며 바에서 노래를 한다. 특히 그는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코코는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기에)>라는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노래를 통해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이 시기에 샤넬은 ‘에티엔 발상’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샤넬의 삶은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샤넬과 달리 상류층이었다.  바로 이것이 샤넬이 패션계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된다.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 유행하던 스포츠는 승마였다. 하지만 여성들은 승마를 타는 것보다 자신들의 옷을 추스르는데 더 급급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샤넬은 남성용 승마바지를 개조해 여성용 승마바지를 만들어 여성도 스포츠활동을 즐길 수 있게 해 상류층 패션계에 큰 바람을 몰고왔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 샤넬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샤넬은 어딘가에 종속되고 묶여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했고 그런 샤넬에게 에티엔 다음으로 또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영국의 사업가인 ‘아서 카펠’이다. 그는 의상실을 열 수 있는 돈을 지원해 샤넬의 패션계 입문에 큰 역할을 했다. 샤넬은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위해 모자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번져가며 프랑스 캉봉 거리에 ‘샤넬 모드’라는 정식 부띠끄를 열고 패션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샤넬은 패션계에 있어서 어느 디자이너보다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자신만의 방식을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큰 인기만큼이나 그가 가진 내면의 고독은 점점 심해졌다.  그러나 “외로움을 많이 타, 일하지 않는 일요일이 싫다”고 말할 만큼 그는 외로웠다. 그렇게 일에 집중하며 평생을 보낸 그는 71세 때, 다시 시작한  부띠크 ‘메종 드 꾸뛰르’도 큰 성공을 이뤘다. 그리고 그는 87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0년대 이전시대 여성들에게는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엉덩이는 한껏 부풀린 드레스가 큰 유행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난 후 그런 패션은 사치에 불과했고, 많은 여성들이 샤넬의 특징인 옷의 활동성과 편안함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비로소 샤넬의 시대가 시작됐다.
  샤넬의 자유분방한 성격처럼 꽉 조이고 불편한 옷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는 몸이 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옷을 디자인했다. 예를 들어 가볍고 신축성이 좋아 남성의 속옷재료로 사용하던 저지소재를 사용해 여성복을 디자인했다. 그 후에도 그는 단순하고 입기 쉬운 드레스나 느슨하고 신축성 있는 소재를 사용한 옷을 만들어 코르셋으로부터 조여 왔던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이런 샤넬이 만든 패션변화는 오늘날, 가치관을 변화시킨 발명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패션계 혁명은 이 뿐만이 아니다. 당시 장례식에서만 입는 우울한 색으로 여겨지던 검정색을 드레스에 접목시켰다. 특히  이 드레스는 이전과 달리 길이를 무릎 정도까지 잘라 여성들의 치마 길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리틀 블랙드레스는  ‘피부색이 밝아보인다’, ‘날씬해보인다’라며 좋은 반응을 보였고 샤넬의 트레이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시절을 뒤로 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중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독일 군인으로 인해 나치의 일에 개입하게 돼 자신의 부띠크를 폐쇄했다. 그리고 스위스로 떠나 잠적한 후 71세 나이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재기한다. 이때 그는 굵은 양모를 사용해 만든 트위드 소재의 투피스와 진주 목걸이로 다시 한번 패션계에 큰 열풍을 일으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단순하지만 우아함이 있는 트위드 소재의 자켓은 많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진주목걸이도 검정색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은은한 아이보리빛 진주가 한층 더 옷을 돋보이게 하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얻었다.
  이 뿐만 아니라 향수, 구두, 가방 등 많은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대표적인 향수 ‘샤넬 NO.5’는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당신은 잠자리에 들 때 무엇을 입는가’라는 질문에 “샤넬 NO.5 한방울”이라고 답했을 만큼 매혹적인 향수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샤넬이 다시 재기했을 때 함께 등장한 ‘2.55백’은 당시의 다른 핸드백들과 달리 핸드백에 끈을 달아 사용하는 데 편리함을 더했다. 거기다 체인과 가죽을 사용한 이 핸드백은 샤넬 특유의 멋스러움이 잘 표현돼 지금까지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샤넬이 가진 특유의 모던함과 혁신성은 현재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샤넬’을 이끌고 있는 ‘칼 라거펠트’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는 샤넬만큼이나 여성의 권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매 시즌 새롭고 ‘샤넬’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스타일로 많은 여성에게 우아함과 멋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우리 학교 패션디자인정보학과 은숙 교수는 샤넬에 대해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소재 선택과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는 현대적인 여성을 위한 실용적이고 단순한 스타일을 보여줬다”며 “자신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기능적 실용성을 추구했던 192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진정한 모던 패션의 창조자”라고 전했다.
  단순히 옷이라는 개념을 넘어 한 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샤넬. 보여주는 패션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패션을 개척했던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류도연 기자

tjdwls9933@cbnu.ac.kr

 

 

  이렇듯 1900년대 초반의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코코 샤넬’에게도 라이벌은 있었다. 바로 패션계의 초현실주의자라고 불리던 ‘엘자 스키아파렐리’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코코 샤넬’의 라이벌로 꼽힐 만큼 1920년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엘자 스키아파렐리’.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1890년 9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11월 13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귀족 출신의 어머니와 유명한 학자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로마대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하던 중 그가 당시에는 파격적인 내용의 시집을 발표하자 그의 가족들은 그를 수도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는 단식투쟁을 통해 수도원을 벗어나 홀로 런던으로 향했다. 이후 프랑스 백작인 ‘윌리엄 드 웬트 드 컬로’와 결혼해 뉴욕에서 딸 ‘마리아 루이자 이본느 라드하 드 웬트 드 컬로’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그는 1922년 파리로 건너가 경제적 자립을 위해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다.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패션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가 패션계에서 빛을 발했던 순간은 1927년 11월에 열렸던 니트웨어 컬렉션이었다. 그는 *트롱프뢰유(눈속임 기법) 스웨터를 선보이며 찬사를 받았다. 그는 눈속임 기법을 옷에 최초로 접목시켜 스웨터의 앞부분에 마치 진짜 리본을 묶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후 그는 점차적으로 니트웨어에서 스포츠웨어 등으로 패션작품의 폭을 넓히며 패션디자이너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한 ‘엘자 스키아파렐리’에게는 패션계의 초현실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살바도르 달리’, ‘장 콕토’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초현실주의 패션을 창조했다. 특히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협업해 만든 ‘찢어진 Tear 드레스’와 ‘랍스터 드레스’는 초현실주의 패션의 대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초현실주의 패션을 통해 옷의 기능과 목적, 가치에 대한 고정 관념에 도전했고 예술적 상상과 유머, 위트를 표현하는 몸 위의 캔버스로서 옷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처럼 예술과 패션의 만남을 통해 창조된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독창적인 의상들은 1930년대 패션을 이끌었다.
  1930년대에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패션이 초현실주의 패션만으로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패션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과감한 도전과 혁신이 담겨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31년 윔블던대회에서 챔피언 ‘릴리 알바레즈’가 입어 화제가 됐던 치마바지를 들 수 있다. 이 의복은 그가 기존의 테니스경기에서 여성 선수들이 넓게 퍼지는 스커트를 입고 경기를 하는 모습에서 고안한 디자인이었다.
  또한 그는 여성복에 지퍼를 최초로 사용한 디자이너였다. 그가 여성복에 지퍼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지퍼는 단순히 속옷이나 가방에만 이용돼 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기존의 관점을 바꿔가며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채색을 주로 사용했던 ‘코코 샤넬’과는 반대로,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강렬하면서 밝고 화려한 색상을 주로 사용했다. 그가 사용했던 화려한 색상들 중에서 1937년 크리스티앙 베라르와의 작업 과정에서 탄생한 ‘쇼킹 핑크(Shoking pink)’는 그녀를 대표하는 색상으로 남게 됐다. 밝고 강렬한 색상인 이 색상은 특히 이브닝 케이프, 립스틱, 액세서리 디자인 등에 자주 사용됐다.
  이처럼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쇼킹 핑크’에서 등장한 ‘쇼킹’은 이후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그는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한 자서전 <쇼킹 라이프(Shocking Life)>를 출간했으며, 1938년에 영화배우 ‘메이 웨스트’의 굴곡진 몸매를 재현해 만든 병을 디자인해 만든 자신의 향수에 ‘Shocking(충격)’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패션뿐만 아니라 컬렉션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음악, 예술, 패션과 융합된 컬렉션을 시도했던 ‘엘자 스키아파렐리’. 그에 대해 우리 학교 패션디자인정보학과 은숙 교수는 “스키아파렐리는 예술과 패션의 만남 그리고 컬러, 형태, 소재의 유희를 통하여 기존의 의복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디자인 발상을 했다. 그녀 자신이 거부했던 ‘불가능’이란 단어를 패션 속에서 모두 표현 가능한 것으로 시도했던 패션의 초현실주의자이며 ‘Shocking’ 패션의 선구자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세계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의 패션작품들은 여러 현대 예술가들과 ‘돌체&가바나’, ‘존 갈리아노’ 등의 유명 디자이너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홍지희 기자

hjh38124@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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