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서울의 고궁 중에서도 가장 자연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창덕궁. 1405년 태종이 요양을 위해 별도로 머물렀던 이궁(離宮)으로 건립된 창덕궁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롭게 건축돼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불린다.
이런 평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축물은 바로 창덕궁 후원이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궁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후원은 자연적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조성해 놓은 모습이 인상깊다.
창덕궁 후원의 고유한 이름은 없지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궁궐 뒤편에 자리 잡은 정원이라 ‘후원(後苑)’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궁궐의 안에 위치 했다고 해서 ‘내원(內苑)’,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불가해서 ‘금원(禁苑)’, 또 구한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할 때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을 비원(泌院)으로 뒀는데 그 명칭이 기록에 남아있어서 ‘비원(秘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주합루(宙合樓)와 어수문(漁水文)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지은 2층 누각이다. 1층은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으로 2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로 건축돼 있다. 주합루는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으로 많은 문신의 자취가 담긴 곳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왕과 신하들이 모여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긴 학문과 예술의 집합지였다. 특히 현판에 새겨진 필체는 정조의 친필로 쓰였는데, 학문을 부흥시키고 더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자 한 의의가 담겨있다.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인 어수문에는 재미난 철학이 엿보이는데, 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로 비유한 이 문은 부용지의 물고기가 현명한 물을 만나 용이 돼 하늘로 오르는 인재 등용문을 뜻한다. 또 이 문은 큰 문과 양 옆 작은 문으로 이뤄져있는데 왕은 정문을 통해 지나가고 신하들은 옆문을 통해 주합루로 올랐다.
■ 부용정(芙蓉亭)

연못에 피어있는 꽃을 형상화해 만든 건축물로 2012년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된 바 있다. 연못에 떠있는 누간을 기존 건물보다 약간 높여 건물의 조화를 생각했고, 평면에 생긴 모양대로 쪽마루를 내어 어디로든 출입이 자유롭게 건축했다. 주합루에서 부용정을 바라보면 마치 연못에 떠있는 꽃처럼 아름답다.
■ 영화당(暎花堂)
원래는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열거나 활을 쏘는 곳이였지만 정조때 부터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이 열리는 장소로 바뀌었다. 특히 영화당은 다른 건축물과 달리 화려하지 않고 정갈해서 더욱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한국적인 미를 잘 보여준다.
창덕궁 홍보해설팀은 “창덕궁 후원은 주변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경사져 있는데 이런 점에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을 엿볼 수 있다”며 “이런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고, 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개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창덕궁 후원은 바쁘게 살고있는 현대인에게 잠시나마 자연으로 돌아가 볼 수 있는 휴식을 제공한다.
류도연 기자
tjdwls9933@cbnu.ac.kr
<창경궁>
창경궁(昌慶宮)은 원래 세종이 즉위했을 당시 물러난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이후 1483년에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안순왕후의 거처를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세운 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이 궁은 창덕궁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과 함께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까지 했다. 그리고 창덕궁과의 연결 통로인 함양문을 통해 두 궁을 연계 관람할 수 있다.
창경궁은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에 의해 창경원(昌慶苑)으로 불렸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09년에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해 창경궁을 크게 훼손시켰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했으며, 궁 안에는 벚나무 수천 그루를 옮겨 심어놓고 벚꽃놀이도 했다. 이로써 궁궐이 아닌 동·식물원으로 소풍 장소로 자리매김 해나갔다. 그리고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명칭을 마음대로 바꾸며 궁궐로서의 위엄을 격하시켰다. 하지만 1980년 정부에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웠다. 일본식 건물을 철거해나갔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단풍나무로 교체하는 등의 노력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바꿔나갔다. 이 복원과정에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된 동물원과는 달리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역사적·건축적 의미로 인해 남아있게 된 곳이 있다. 바로 대온실이다.
■ 대온실
이곳은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이다. 또한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로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이곳은 일제가 순종을 폐위시키고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대온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창경궁관리소 관계자는 “창경궁은 동향으로 지어져있다는 것이 다른 궁들과는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며 창경궁의 특색에 대해 전했다.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덕수궁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곳은 아니지만 경복궁이나 덕수궁 못지않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여유롭게 바람과 함께 궁을 거닐고 싶다면 창경궁 대온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추천해본다.
홍지희기자
hjh38124@cbnu.ac.kr
<경희궁>
경희궁(慶熙宮) 터는 원래 정원군의 사가였던 곳으로 왕의 기운이 서렸다고 해 광해군이 빼앗아 지은 궁이다. 원래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정원군의 시호와 같아 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또 이 궁은 ‘야주개대궐(夜照峴大闕)’이라고도 불렸다.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한밤 중에도 야주개 일대를 밝힐 만큼 빛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희궁은 일제의 만행으로 인해 훼손되기 시작했다. 개항 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고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다. 또 1915년엔 경성중학교를 궁터에 설립하는 등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그래서 현재에는 일부의 건축물만 남아있을 뿐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비운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경희궁 속으로 들어가보자.
■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으로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 궁궐 건축이다. 이곳에서 경종, 정조, 헌종 세 임금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또한 1829년에 경희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때 숭정전은 유일하게 화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 건물도 1926년 일제에 의해 일본인 사찰로 이전됐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 태령전(泰寧殿)
희궁에서 오랫동안 정사를 살폈던 영조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이 보관된 곳이다.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도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곳은 선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했던 반면에 태령전은 현왕의 어진을 보관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곳 역시 일제에 의해 소실됐으나 2000년 서궐도안(경희궁궐 배치도)을 바탕으로 새로 만들었다. 또한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를 모아서 만들었다.
■ 서암(瑞巖)
태령전과 자정전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안쪽이 움푹 패인 형태를 보인다. 원래 왕암(임금님 바위)라고 불렸는데 이 바위 때문에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바위 속에 샘(암천)이 있으며 바위에 새겨놓은 물길도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1708년숙종이 직접 바위의 이름을 서암으로 바꿨으며 글자를 사방석에 새겨두게 했다.
서울의 고궁 중 복원된 규모가 가장 적어 관람하러 오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경희궁. 하지만 궁을 복원하려는 계획은 지지부진하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올 초 기사에 내년부터 경희궁 정비계획에 관한 내용이 언급됐는데 용역 업무가 진행이 안 돼 세부 사항은 없다”며 “경희궁 복원 사업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정해진 사안이 없다”고 밝혔다.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사업이 하루 빨리 이뤄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최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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