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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3.11.27 월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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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유라
5월, 학생운동을 추억하다
제 973 호    발행일 :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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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밀물이 또 나를 그 오월로 돌려보내더라도 ... 다시 만날 그날까지 열심히 헤엄쳐볼게요’.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오월의 청춘>속 주인공 황희태의 내레이션이다. 5.18민주화운동을 빼놓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매년 5월이면 국가의 폭력에 죽어간 그날의 희생과 민주주의 대한 열망을 기념하지만, 요즘 대학생에게 그날의 의미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성공적 민주화를 이룬 덕에 최루탄과 이에 맞선 학생들의 구호와 함성은 이젠 꼰대들의 ‘나 때는’으로 여기는 따분한 이야기가 됐고, 학생운동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조국의 미래, 자유와 평등, 민족의 통일에 대한 담론은 현실과 취업의 무게에 설 곳이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발전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엄혹한 시절 대학의 모습을 되짚어 오늘의 우리를 비춰보고자 한다. 본 기사는 학생운동에 대한 연구물들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대학의 학생운동 역사

  학교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일으키는 활동이나 투쟁을 ‘학생운동’이라 한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학생운동을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현대 학생운동의 시작은 1960년 4월 혁명으로 본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항거에서 시작해 시민혁명으로 발전한 4월 혁명은 독재 정권을 몰락시키고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고등학생이 주축이 된 2·28 대구 학생 시위에서 시작한 4월 혁명은 대학생들의 합류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 수교에 반대한 6·3항쟁, 1969년 3선 개헌 반대 시위, 1971년 교내 교련 반대 시위로 이어진다.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반정부, 반유신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1974년 <긴급조치 1호>의 선포와 함께 이른바 ‘긴급조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학생운동은 써클 활동을 중심으로 한 지하운동으로 변모했다.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행위를 금지하고, 금지행위의 선동·선전 및 전파 행위 금지 등의 위반자 및 비방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몰락하고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학생운동은 분수령을 맞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5·18민주화운동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정권 장악 움직임에 대항해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회를 요구하면서 전개됐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가 있었고, 다음 날인 16일 광주에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신군부는 시위 주동자 연행과 체포를 시작했고, 광주의 대학에 특전사를 투입했다. 5월 18일 투입된 군인들은 시위 참여자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으로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고, 사망자도 나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계엄군의 진압이 아닌 학살은 계속됐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는 학생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참여해 점점 더 많은 인파가 몰렸다. 늘어난 시위대에 놀란 계엄군은 5월 21일 시민들을 향한 집단 발포를 한다. 이에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장을 시작했고, 계엄군과의 교전도 불사했다. 시민군에 밀린 계엄군은 21일 저녁 광주에서 철수했지만, 27일 재진입해 시민군을 무력화시키고 광주를 재점령한다. 10일간의 5·18민주화운동 사망자 수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 800여 명에서 최대 2,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또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며 접근하는 민간 차량에 총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해 무수한 희생자를 냈고, 학살을 숨기기 위해 암매장도 서슴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은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줬고, 이후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이전의 지사(志士)적 자세를 벗어나 혁명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를 묵인하고 지지한 미국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반미운동이 시작됐다. ‘철폐하라’, ‘퇴진하라’가 주였던 1970년대의 시위 구호는 ‘파쇼(파시즘)정권 분쇄’, ‘전두환 정권 타도’ 등의 전투적 구호로 바뀌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노동·농민 운동과 연계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야학과 농활이 일상이 되고, 직접 노동자가 돼 노동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신군부가 집권한 5공화국 내내 빨갱이로 색깔 입힌 폭압 속에서도 학생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1985년 2월 총선에서 야당으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은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고,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하려 했고, 1987년 1월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설명을 내놨지만, 진실은 은폐할 수 없었고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던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직선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6월 10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국적인 학생시위가 시작됐고, ‘넥타이부대’(사무직 종사자)로 대표되는 시민들까지 시위에 합세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며 국민에게 항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탄생한 것이 지금의 헌법과 6공화국이다.
  제6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상당한 동력을 상실했지만, 1990년대 학생운동은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를 중심으로 여전히 시대의 담론을 견인하며, 청산되지 않은 군부독재 세력과 기득권에게 사회 정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의 학생운동은 시들기 시작했다.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는 학생운동을 반체제 폭력집단으로 낙인찍어 대중으로부터 소외시켰고, 1997년 IMF 금융위기는 경제적 곤란이나 취업과 같은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만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또한 학부제 도입과 같은 대학의 대대적인 학제 개편은 학내 기초 생활단위인 학과를 해체해 파편화된 학생들의 현실과 욕구를 읽어내고 결집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은 뚜렷하게 감소했고, 학생회 선거 투표율은 매년 낮아졌으며, 급기야 후보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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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담론을 이끈 학생운동

  1960년 4월 혁명을 계기로 학생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실증적으로 검증받았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1960년 학생운동은 ‘사회의 유일한 양심세력’, ‘사회의 감시자’라는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하고 ‘문제 제기’ 집단으로서 정치 시위를 주도하면서 정치과정에 참여를 시도했다. 하지만 1960년대는 현실적으로는 자유도 없고 평등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허망한 이데올로기의 기치가 국민 다수를 기만하는 시대였다. 이에 대한 저항 세력이 이상주의와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세대들, 그중에서도 학생이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학생운동은 서구적 민주주의 이념을 이상으로 한 반독재 민주 회복 운동이었으며, 남북 간의 문화, 정치, 경제의 교류를 통해 평화적 민족 통일을 이루고, 정부의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낭만적이고 소박한 민족주의의 특징을 띤다.
  1970년 학생운동은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심화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민주적인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유신체제 반대운동이 주류이긴 했지만,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근로조건 개선과 빈민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생운동 내부는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 함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자는 주장(현장 준비론)과 이러한 빈곤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정치 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정치 투쟁론)으로 나뉜다.
  학생운동의 ‘현장 준비론’과 ‘정치 투쟁론’ 논쟁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학생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논쟁은 1980년대 들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무림’과 ‘학림’논쟁, ‘깃발’논쟁 등을 거치며 학생운동의 주장은 정교해지고 이념화됐다. 그리고 그 치열했던 논쟁은 민족해방(NL) 노선과 민중민주(PD) 노선으로 귀결되었고, 1990년대 학생운동까지 이어진다. 민족해방(NL) 노선은 우리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제국주의에 의한 남북 분단을 우리 사회 모순의 원인이자 출발로 진단해 주로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조국 통일 등을 주장했다. 반면 민중민주(PD)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계급에 있다고 보고 노동운동과 연계해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재벌해체를 주장했다.
  엄혹한 독재정권하에서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자신보다 우리 사회와 나라를 위한 고민이 먼저였다.

우리 시대 담론과 학생운동

  요즘 대학에서는 출마자가 없거나 과반에 못 미친 투표율로 비상 대책 위원회가 학생회를 대체하는 일이 일상이다. 개인주의가 익숙한 지금의 대학생들이 만든 세태일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 대학생들이 우리 사회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다.
  지난달 23일 ‘바른언론시민행동’이 발표한 <2030세대 사회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고, 20%만이 ‘공정하다’고 답했다. 분야별로 보면 법집행 68%, 재산형성기회 68%, 취업기회 59%, 임금이나 보수는 60%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또 ‘노력만 하면 취업은 무난하다’는 질문에는 6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고, ‘우리 사회는 좋은 일자리가 많다’는 질문에는 69%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으며,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 여부에는 무려 81%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만이 많은 청년층인데, 왜 과거처럼 기성세대와 기득권을 향해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처럼 격렬한 시위를 하지 않을 뿐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3년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에게 한 대학생이 던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면 당시 대학가에 큰 울림을 주었다. 2018년 대학가는 ‘미투’ 운동으로 대학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근절하는 데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다. 대학생으로서 작지만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실천하는 이도 적지 않다. 공정무역 제품을 소비하고, 부도덕한 기업 제품은 불매하며,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며 우리 사회의 작은 변화를 바란다. 또한 SNS를 중심으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며, 학내 불합리한 문제를 고발하거나 때로는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물론 과거 학생운동의 결연함과 치열함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학생운동은 지금의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담론을 생산하며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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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1970년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효자동 이발사>,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드라마 <오월의 청춘>과 영화 <택시운전사>, <화려한 휴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 등을 보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그 시절의 대학생은 이젠 50~60대가 됐고, 그들의 자녀는 지금의 청년세대다. 부모 세대는 민주적이고 정의로우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생운동을 했지만, 자녀 세대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불의하며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학생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현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최악이 됐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법은 달라도 학생운동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 참고자료
김주삼(2022) “한국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대학생의 역할”, 김재경(1996) “한국학생운동과 사회변동”, 서중석(1997) “1960년 이후 학생운동의 특징과 역사적 공과”, 임경택(1990) “한국학생운동의 성격에 관한 연구”, 조대엽(2005) “198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과 민주화운동의 급진적 확산”, 최승원(2009)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위기와 대응”

양유라 기자
ulxx1013@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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