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정의
법은 윤리, 철학 및 종교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정의에 함의되는 내용도 다양하고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법이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규율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 의하여 보장된 규범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관점에서 법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원 간의 평등, 공공복리를 위한 합목적성, 평화를 위한 법적 안정성을 동시적으로 충족하여야 한다.
법의 체계와 발전
역사적으로 법은 다양한 형태와 체계로 나뉘어 발전하여왔다.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법은 영미법, 대륙법, 사회주의법으로 그 체계를 구분할 수 있다. 영미법은 개인주의에 바탕으로 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법은 단체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를, 대륙법은 자본주의에 단체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형태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이들 법체계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속에서 공동체의 공통선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 법체계는 완연히 퇴색되고, 대륙법에는 유럽 시장의 통합과 더불어 영미법의 개인주의사상이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사적자치 원칙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평등 보장이 우선이고 국가는 소극적으로만 간섭하는 자유주의적 법체계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들의 관계나 사회질서의 형성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인보다는 사회와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국가적 법체계로 변천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사회국가적 법체계 속에서 개인, 사회, 그리고 국가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과거의 법체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이른바 절차주의적 법체계라는 새로운 형태의 법체계가 형성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 체계의 출현은 자유주의적 법체계는 ‘강자와 약자의 분리’라는 사회적 결과를 야기하였고, 사회국가적 법체계는 ‘국가에 의한 개인의 지배’라는 문제점을 노출시켜 법에 의한 사회의 통합과 사회에 의한 법적 통합을 달성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절차주의적 법체계에서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영역에서 구성원의 자율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하여 법의 정의에 부합하는 결과를 스스로 도출하고, 국가는 구성원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한 조정적 절차만을 규율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여 이 체계에서는 자율 규제가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직 이러한 단계에 들어왔다고는 할 수 없고, 절차주의적 법체계 또한 실험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 성공을 낙관하기도 쉽지 않다.
한편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서구의 법체계가 발전되어 온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근대법은 일본의 식민 통치와 맞물려 이식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구의 근대법이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사상은 외면한 채, 법을 식민 지배 수단으로써 왜곡된 모습으로 들여왔다.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근대법 사상은 1948년 헌법 제정과 1962년 대한민국 법령을 제정하면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조직과 경영을 위한 법체계 역시 대륙법을 계수한 일본법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일본법을 통하여 서구의 사회국가적 법체계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른바 다양한 방면에서의 국제화가 보편화되면서 서구의 현대화된 법체계를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법체계는 법문화의 동질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본법으로부터 밀접한 영향을 받는 관계에 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여전히 대륙법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개인주의적 법사상이 바탕이 되는 영미법적 요소가 빠른 속도로 가미되는 사회국가적 법체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구와는 달리, 짧은 역사 속에서 법체계가 형성 발전되어 온 결과, 법체계의 발전 속도와 공동체의 법문화 수준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사회의 위험과 법
법체계의 변천은 공동체의 발전에 따른 경험적 귀결이다. 법이 공동체의 공통선을 추구하지 못하는 때에는 역사 발전의 법칙상 새로운 대안적 법체계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국가적 법체계는 지나치게 사회적 연대성을 추구하는 나머지,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 또는 이해 충돌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는 과학 기술, 인터넷 등의 발전에 따라 정보화 사회, 위험 사회, 과학 기술 사회라고 불린다. 이러한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에 국가의 간섭이 극대화되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공통선이 상호 충돌하고, 법의 정의로운 모습이 제 모습을 잃기 쉽다. 여기에 정의로운 법체계와 법학이 추구하여야 할 곤혹스러운 과제가 있다.
컴퓨터의 발달로 공동체 구성원인 개인의 정보가 컴퓨터에 정보화되는 것은 개인에 대한 국가관리의 편익과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적 자유가 상실될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 전자주민카드에 의한 공동체 구성원의 정보관리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법체계는 마치 유리처럼 투명한 존재가 된 개인을 감시하는 합법적인 도구로 전락될 위험이 높다.
현대사회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산업화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생활 수단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인적인 편익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포괄적인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환경오염은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로 만드는 대표적인 과학 기술 위험이다. 이 위험은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인류의 존재 기반인 자연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광범위하고도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현대사회는 20세기말 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과학 기술로 말미암아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는 잠재적인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생명공학이나 유전자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러한 위험의 한가운데에 있다. 인간복제, 수정란 이식, 유전자에 의한 동식물 복제 등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편익과 인간을 궁극적으로는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진 대표적인 과학 기술이다.
법학의 미래
앞으로 공동체의 사회적 질서에 초래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가. 다른 과학 역시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특히 법학은 대량적이고 총체적인 잠재적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정의로운 법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법체계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치중한 나머지 공동체의 공통선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사회국가적 법체계가 나타나 그 모순을 해소하고자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대안을 찾는 것이 바로 법학의 미래이다.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볼 때에 법학이 추구하여야 할 방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정보 사회화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법과 사법의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정보적 자기 결정권을 강화하여 국가에 의한 정보관리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자기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위험 사회화로부터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파괴적이고 총체적인 위험 요소를 가진 과학 기술의 맹목적인 개발과 상품화에 앞서 국가에게 사전적인 위험 방지의무를 부과하여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초래될 위험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만 전가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과학 기술 사회화로부터 인류와 공동체를 영구히 유지 존속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가 이성으로 수용할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과학 기술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에 적합한 최선의 법모델은 그 구성원의 법문화 수준과 조화될 때에만 정의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정의로운 법체계의 실험에서 20세기 말에 사회주의 법체계가 몰락한 것은 인류가 경험한 소중한 반성적 이데올로기 유산이다. 아울러 21세기 초입부터 인류를 쓰나미처럼 덮친 영미법상의 신자유주의 법체계 또한 인류에게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역사적 경험이다. 신자유주의 법제는 시장에서의 방임적 계약 자유를 방관함으로써, 공동체의 공통선 보다는 개인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말 이전의 자유주의적 법체계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정치 지배 권력이 공동체의 공통선을 위한 수단으로써 정의롭지 못한 법을 선택할 경우 얼마나 그 위험이 폭발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의 법학은 미래에도 사회국가적 법체계로서의 틀을 견지하는 대원칙에 충실하여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남용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국가의 개입 역시 남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영역에 고도의 자율권을 부여하고 국가는 조정 역할에만 충실하자는 절차주의적 법체계도 날카로운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어서 정의로운 법의 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대안은 아닌 것 같다. 법학은 이미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온 영미식 신자유주의법과 공동체 부의 창출에 미흡한 유럽식 사회적 자본주의법을 검증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국가적 법체계가 나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금 법학은 전통적 간섭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적 자본주의라는 세 갈래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그 선택과 조화를 위한 촛불을 밝히는 것, 그것이 바로 법학의 미래이다.
법학전문대학원
송종준 교수








최윤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