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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모든 것을 다 거부한 긍정주의자
제 914 호    발행일 :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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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영문학자인 장-자크 르세르클은 언어 철학과 문학 이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특히 그는 난해하다고 악명이 높은 들뢰즈 철학을 ‘언어’를 매개체로 일관되게 연구해왔는데, <들뢰즈와 언어>(Deleuze and Language, 2002; 이현숙.하수정 공역, 그린비, 2016)는 그 산물이다. 옮긴이의 설명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된 자료가 부재한 들뢰즈 언어의 복잡한 차원을 세분화하고 이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주지하듯 들뢰즈는 구조주의 등 1960년대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큰 흐름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서구의 양대 지적 전통인 경험론과 관념론이라는 사고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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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의 이런 철학적 검토는 그의 언어학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들뢰즈는 언어(학)를 불신한다. 그의 언어에 대한 불신은 자신의 철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베르그송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르그송은 구조주의에 반대하고 구조주의의 실증주의적 전통에 의해 무시되었던 철학자들을 부활시켰다. 베르그송의 후예로서 들뢰즈 또한 언어에 대해 상당히 ‘불신’했고, 그에 병행하는 ‘망상’을 동시에 택했다.
  들뢰즈가 언어학을 반대하고 불신한다고 해서 모든 언어학을 반대하고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반대하고 불신한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소쉬르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전반 언어학을 지배했던 언어철학 및 연구방법론이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하나의 체계, 즉 ‘구조’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문법 요소보다는 요소 간의 관계를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즉 한마디로 구조주의 언어학은 기표와 기의의 안정적 관계를 중시한다. 반면 들뢰즈는 이를 부정한다. 대신 그는 언어의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명확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학에서 기표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재현과 해석에 근거한 언어의 개념을 지향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기표와 기의뿐만 아니라 ‘메타포’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반감의 태도를 견지한다. 왜냐하면 메타포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보편성과 추상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언어에 부과하는 꽉 짜인 규율이 자연어의 작용에 빈약하고 혹은 종종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의 중요 기능을 ‘정보 전달’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언어를 다루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추상과 보편이라는 한계를 가진 채 ‘언어학의 건축학’이라는 형식화로 귀결된다. 반면 들뢰즈는 언어학을 ‘지도제작’과 비슷하다고 파악한다. 즉 건축학에서는 건축의 각각의 요소가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지만, 지도제작에서 각각의 요소는 그 자체로는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오직 전체적인 ‘맥락’에서만 중요성을 획득한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의 언어학에서 언어는 하나의 면으로 간주될 뿐이고, 서로 다른 면들이 혼효되고 새로운 맥락을 형성할 때야 비로소 유의미하다. 이처럼 들뢰즈는 언어의 보편성과 추상성보다는 언어의 이질성과 다양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들뢰즈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와 상반되는 영미화용론과 하버마스의 소통철학에도 반대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영미화용론의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개념을 차용한다는 점이 문제고, 소통철학의 경우에는 소통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소통의 과잉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언어의 본질에 있어서 소통 행위나 문답과 대화를 강조하는 소통이론도 반대하고, 방법론적 개인주의, 이상주의적 의미 이론, 대화적인 상식과 보편적인 윤리적 격률에의 보편적 의존을 바탕으로 하는 영미화용론도 반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런 반어학적인 전회의 결과는 칸트적 용어로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칸트 철학과도 거리를 둔다. 요컨대 들뢰즈는 어떤 특정한 철학적 사조나 철학적 경향을 반대한다기보다는 사고의 틀을 가두는 형식 또는 구조와 그것의 추상화와 보편화를 경계한다. 바로 이점이 들뢰즈 언어학, 더 나아가 들뢰즈 철학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들뢰즈는 구조주의 언어학을 불신한다. 또한 그는 촘스키의 유물론적 언어학도 거부한다. 촘스키는 인간은 유한한 규칙에 따라 무한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규칙을 수학적인 엄밀성으로 정식화하려 한다. 들뢰즈는 대신 ‘의미의 존재론적 혼합’, 혹은 ‘특이성들의 분포적인 내재면을 추구하는 선들의 존재론적 혼합’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언어철학의 중심에는 ‘텍스트의 규칙 파괴적 창조성’이 위치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지향점은 푸코와 유사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들뢰즈 자신도 푸코 철학을 어느 정도 환영했다. 왜냐하면 푸코 철학의 본령은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푸코는 ‘근대적 이성’을 비판하고, 역사주의 방식, 다시 말하면 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권력’이라는 문제에 접근했다. 그리고 푸코는 권력이 중앙집권적이지 않고 오히려 탈중심적이라고 파악했다.
  푸코에 따르면, 고전 시대에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존재를 사회적으로 배제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다. 반면 근대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존재를 교육, 교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학교, 병원, 교도소 등과 같은 훈육기관은 근대의 대표적 산물이다. 이곳에서는 ‘지식’과 ‘인간’이 몸과 성을 관리한다. 근대의 권력의 전략은 사회 질서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배제 또는 격리하거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권력은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인간을 정상인으로 복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푸코의 권력을 들뢰즈의 언어로 바꾸어도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근대 권력이 인간을 제어하고 훈육한다는 푸코의 주장과 구조주의를 비롯한 언어학이 인간의 언어를 추상과 보편의 한계에 가두었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공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 철학과 푸코 철학이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철학적 본령이 ‘차이’의 부정이라면, 들뢰즈 철학의 본령은 ‘차이’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둘의 철학적 지향점은 대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의 철학적 방점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성’에 찍힌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들뢰즈는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은 긍정주의자’로 규정될 수 있다.
  들뢰즈는 기존의 언어학을 불신하고 반대하는 동시에 새로운 언어학을 제안한다. 그의 언어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언어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다. 즉 그의 언어비판은 무엇보다 보편적 문법 개념에 근거한 ‘과학적 언어학’의 형식에 대한 비판이지 언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새로운 언어학은 ‘다른 언어철학’, ‘새로운 화용론’으로 명명된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화용론은 언어의 ‘의도’와 ‘소통’에 방점을 두는 화용론이 아니라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화용론이다.
  들뢰즈의 언어 철학적 관심은 언어가 가진 ‘힘’과 ‘흥미’다. 그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은 힘들의 표현이며,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주체들은 ‘힘들의 차이적인 요소들’이다. 결국 힘은 서로 충돌하고, ‘흥미’를 유발한다. 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명제의 의미는 진리를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참신함이나 흥미로움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는 진리를 대체한다.
  들뢰즈가 주류 언어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감화되지 않으면서 언어의 재구성 단위로 삼는 것은 개별적인 화자와 개별적인 발화가 아닌 언표의 ‘집단적 배치’고, 이는 ‘기계’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언어철학에서 기계가 주류 언어학의 구조를 대신한다. 기계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기계가 역학의 의미, 물질성의 의미, 사회적 실천으로서 언어의 중요성의 의미, 그리고 체계의 추상적인 관념성에 대립되는 언어의 구체적인 ‘작용’과 ‘기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기계적 개념은 ‘배치’의 개념으로 확장 발전한다. 배치는 능동적 과정이며, ‘메타포’(은유)가 아닌 ‘메타모르포시스’(변형)이다. 배치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과 사건의 상태, 과정과 결과의 두 의미에서 언표와 언표행위, 욕망이 순환하는 영토로서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운동,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다. 이 가운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들뢰즈의 언어학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들뢰즈 철학의 핵심어다. 탈영토화란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재영토화는 다시 중심으로 향하는 운동으로 간단히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탈영토화는 다시 상대적 탈영화토화와 절대적 탈영토화로 구분된다. 절대적 탈영토화란 상대적 탈영토화의 물꼬를 트는 반시대적 역능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언어학에서 배치는 항상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의 집단적 배치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배치가 새로운 화용론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기표의 제국주의를 탈피하고 주체를 제거했다는 점 때문이다. 새로운 화용론에서 언어의 배치는 수직적이거나 위계화 되어 있지 않고 합류하고 교차하는 평행한 두 면 위의 흐름의 형식 속에서 전개된다. 결국 들뢰즈에게 있어, 언어의 핵심적인 문제는 ‘단어 또는 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는, ‘발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어떤 배치에 삽입되었는가’, ‘언표의 집단적 배치의 일부로서 그것이 어떻게 욕망의 기계적 배치에 연결될 것인가’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들뢰즈의 언어 철학은 재현이 아닌 기능, 로고스가 아닌 신체, 기호가 아닌 절단, 기호화가 아닌 강도이며 주체가 아닌 배치, 정보가 아닌 힘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사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이고,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 분산이다. 또한 자기중심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 그리고 소수자이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소수자 문학’ 혹은 ‘문학적 소수화’를 지향한다. 그는 문학적 소수화를 ‘스타일’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언어가 이질적이고 변주되는 실재라면, 스타일은 언어의 각각의 요소들을 택하여 그것을 연속적 변이에 복속시켜 새로운 언어학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추출하는 것이다. 언어를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 더 이상 언어적이지 않은 무엇까지 끌어당기는 것 역시 스타일을 통해서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는 스타일을 통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비평을 수행하고 예술가로서의 개별화의 가능성을 타진해야한다. 즉 스타일은 예술가 자신의 독창적이고 근본적이고 차이적인 세계관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예술가 혹은 철학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스타일은 들뢰즈를 평생 사로잡았던 문제로서 그의 언어철학 최고의 긴장 지점에 위치한다. 옮긴이의 설명처럼, 스타일은 철학자로서 창조성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평생 스타일에 천착한 들뢰즈는 창조적 파괴를 추구한 긍정주의 예술가 혹은 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언어학을 과학으로 한정시켰다. 그들은 언어를 체계 또는 구조로 파악하며 언어의 동질성과 균형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언어는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와 다름없다. 반면 들뢰즈는 언어학을 철학, 문학, 더 나아가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따라서 들뢰즈 언어학에서 언어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무한히 변주되어 이질성과 다양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또한 언어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불균형은 혼란 또는 혼동과 같은 부정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외부와의 소통 속에서 흐름과 차이, 그리고 그것들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긍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언어의 새로운 의미는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으로 발전한다. 거듭 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긍정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긍정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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