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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과 이스라엘, 그 끝없는 전쟁
제 881 호    발행일 : 2014.09.22 


 
시오니즘 운동

  기원전 63년,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유대 왕국은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정복당한 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종속국이 됐다. 기원후 66~72년 사이 유대인들은 부패한 로마인 총독 플로루스의 세금정책에 반발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반란은 무참히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수십만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노예가 돼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 로마제국의 다른 영토로 분산됐다. 132~135년,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 역시 실패하고 고향을 떠나게 됐다.
  고향을 떠난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통해 그들의 민족성을 지키며 1800년이 넘게 세계 각지를 유랑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됐다. 오랫동안 차별과 멸시에 시달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온 디아스포라는 자신들이 결코 기독교 사회에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고, 드디어 19세기 말 예루살렘의 시온 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오니즘은 주로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참여가 많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실패로 대학살과 탄압이 거세지자 이를 피해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14년경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의 수는 약 9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동지역은 명목상 오스만 터키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구열강의 진출로 인해 그 지배력이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 터키제국 내에 있는 아랍인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전후 아랍인 국가의 독립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의 전쟁 협력을 받아내기 위해 1917년 ‘밸푸어(Balfour) 선언’을 한다. 당시 영국 외상이던 밸푸어(James Balfour)는 영국에 있는 유대인 협회 회장인 로스차일드 후작(Lord Rothschild)에게 편지를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의 건설을 약속했는데 이것을 ‘밸푸어 선언’이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현재의 터키 영토로 축소되고 나머지 영토는 1919년 국제연맹에 의해 분할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신탁 통치령이 됐다.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는 영국의 신탁통치령이 됐고, 현재의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의 신탁통치령이 됐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토착 아랍통치자를 왕으로 삼아 간접통치하는 방법을 택해 비교적 현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직접 통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의 이주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점점 증가함에 따라 이미 펠레스타인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랍인(이하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유대민족기금이 사들인 땅에 세워진 유대인정착민공동체인 ‘이슈브(Yishuv)’는 팔레스타인 서부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 지역의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슈브는 토지를 매입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보이콧하는 수법으로 이 지역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내몰았다. 그 결과 1921년부터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은 유대인의 편에 섰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은 유대인 ‘민족국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더욱 확산시켰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무력 충돌은 더욱 격화됐다. 1947년 11월 UN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분리해 이스라엘을 건국하기로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UN의 분할 안을 환영했으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거부했고, 이들의 갈등은 보다 격화돼 무력충돌로 이어져 팔레스타인 내전이 시작됐다.
  1948년 5월 영국군의 팔레스타인 철수와 함께 이스라엘은 일방적인 독립을 선포했고, 이에 아랍연맹이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동시에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은 아랍세계의 불만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아랍국들은 패전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차지해 건국기반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전쟁에서 아랍국들은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상호불신과 대립 속에서 영토적 야심만을 보였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1956년 7월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선언을 계기로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1869년 프랑스에 의해 건설된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으로 관리했으나 1875년 이집트가 재정난으로 인해 자국의 지분을 영국에 매각함으로써 영국이 이집트를 대신하게 됐다. 더욱이 1882년 이집트의 민족주의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무력 점령했고, 이후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해왔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격분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부추겨 전쟁을 사주했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면서 제2차 중동전쟁이 반발했다. 1957년까지 계속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까지 가세해 이집트에게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침략국으로 규정한 국제여론의 악화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잃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인 소위 6일 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을 위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군사작전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의 기습작전으로 시작됐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의 동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군의 철수, 이 지역의 모든 나라의 영토와 독립의 보장, 난민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다룬 UN결의안 242호를 채택했으나 이스라엘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1973년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찾기 위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으나 별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었다. 1979년 3월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했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전체를 이집트에 반환했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해방운동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와해시키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PLO의 철수를 이끌어낸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규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이 점령지인 가자지구, 서안지구 및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갈등은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PLO와 이스라엘

  1948년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난 아랍인의 수는 약 300만 명에 이르며,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은 여러 무장 단체를 조직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64년 아랍연맹은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PLO를 조직하는데 당시 PLO는 아랍 정부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에서 아랍세계가 참패하자 PLO의 주도권은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파타(Fatah)가 장악하게 됐다. 1969년 파타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Yasir Arafat)가 PLO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PLO는 많은 정파와 테러조직을 포함하는 우산조직이 됐다.
  PLO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레바논과 요르단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며 이곳을 대 이스라엘 무장투쟁의 기지로 삼았다. PLO는 요르단을 본거지로 삼고 남부 레바논 및 이스라엘과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조직을 창설하고 육성했다. 그러나 PLO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을 초래했고, 1970년까지 PLO는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준 독립적인 세력으로 존재하며 국가권력을 위협했다.
  1970년 9월, 팔레스타인 급진 게릴라들이 여객기 3대를 납치해 요르단에 착륙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요르단 군의 활약으로 승객들은 구조됐으나, 요르단 전역에 대한 통제권 상실을 우려한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수도 암만 지역에서 PLO 무장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펼쳐 요르단의 PLO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때 축출된 PLO 무장세력은 고스란히 인접한 레바논으로 유입됐는데 이로써 레바논은 PLO의 독자적인 정치와 군사 활동이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 됐다. 그리고 이는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는 원인이 됐다.
  PLO 본부는 서 베이루트에 자리를 잡고, 이곳에서 PLO의 통합을 유지했고, PLO의 모든 분파를 물리적.경제적으로 지배했다. 1970년대 초부터 PLO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보호하고, 기독교에 대항하는 칼이 되어 달라는 레바논 무슬림들의 요청에 의해 서 베이루트의 지배적인 무장단체가 됐고, 아라파트는 실질적인 서 베이루트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PLO 이러한 지위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PLO 본부가 튀니지로 옮겨가면서 끝났다.
  하지만 PLO를 레바논에서 축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됐다. 그들은 바로 남부 레바논에 거주하던 시아파들로 아말(AMAL)과 헤즈볼라(Hezbollah)였다. 특히 헤즈볼라는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최초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PLO 세력을 축출해준 이스라엘 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이 PLO를 대신할 세력으로 남부 레바논의 기독교 세력을 지원하고 남부 레바논에 대한 점령을 장기화하면서 시아파들은 이스라엘의 적이 됐다.
  또한 1987년 12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 군대가 충돌한 폭력 사태를 계기로 인티파다(Intifadah)가 시작됐다. 이스라엘의 최신형 무기에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모습은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국제여론을 만들었고, 급기야 1994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다. PLO와 이스라엘이 서명한 이 협정에 따라 PLO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과 고립정책이 계속되고, 서안지역은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통해 식민지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Hamath) 등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재개했다. 현재 PLO은 서안지구를 통치하고 있으며, 가자지구는 2006년 선거에서 부패한 PLO를 대신해 집권한 하마스가 대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종교와 민족적 자존심을 건 대립은 수그러졌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을 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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