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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발언’에 저항하라
제 918 호    발행일 : 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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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조사에 따르면 2016년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논문 키워드는 ‘여혐’이었다. 그 가운데 <온라인상의 여성 혐오 표현>, <왜 한국 남성은 한국여성들에게 분노하는가>, <일베와 여성 혐오>는 연구자들 사이에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들이다. 그 외에도 다수의 여혐 논문들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었고 주목을 받았다.
  여혐은 연구자들의 관심사로만 그치지 않고 사회 문제로 종종 비화되어 언론과 대중 또한 주목했다. 여혐, 더 넓게 혐오, 혐오 발언은 2016년 한국 사회의 아주 특별한 순간을 예거한 키워드다. 혐오 발언은 보통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혐오의 언어적 인상을 포함한다. 하지만 혐오 발언은 매우 다층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엇이 혐오 발언이고, 어디까지가 혐오 발언인지 판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혐오 발언 당사자들이 은폐와 위장의 전략을 취하는 경우 혐오 발언을 판별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렵다.
  지금까지 혐오와 혐오 발언은 주로 온라인상에서 행해졌지만 최근 들어서는 오프라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혐오 대상도 여성에만 그치지 않고 경제적 빈곤층,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혐오 발언의 수위 또한 이제는 소수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요컨대 혐오와 혐오 발언은 장소, 공간, 그리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그 정도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인지 최근 국내.외적으로 혐오 또는 혐오 발언과 관련된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고, 혐오 발언과 관련해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와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며 토론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발언>(유민석 옮김, 알렙, 2016)에서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의 문제점, 혐오 발언에 대한 수신자들의 저항을 비롯해서 침묵이나 전유, 언어와 권력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문제, 언어적인 상처, 타인의 호명으로 탄생하는 주체의 문제, 언어적 생존이나 화자의 책임 등과 같은 언어와 권력, 저항에 관한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철학적 질문들을 다룬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서 무엇보다도 혐오감과 이에 근간한 혐오 발언에 대한 대중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녀는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혐오 발언이 곧 혐오 폭력인가’, ‘인종차별, 여성차별, 동성애차별은 곧 차별행동인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혐오 발언을 학술의 장에서 대중적인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전술했듯이, 혐오 발언은 이제는 몇몇 극소수의 일탈 행위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혐오 발언이 어떻게 그런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혐오 발언 행위의 주요 효과가 개인적인 피해자나 피해자 집단 측의 잠재적인 대응을 침묵시키는 것, 즉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 발언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혐오 발언 피해자를 위해 국가가 직접 혐오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혐오 발언자들은 국가 권위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그들이 내뱉는 “혐오 발언은 국가 개입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공적 영역 내에서의 자신의 자유로운 작동을 통해 묘사하거나 촉진시키는 종속을 야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기 때문에, 혐오 발언은 국가적으로 규제되어야 한다. 즉 혐오 발언자는 힘없는 시민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라는 주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자이고, 혐오 발언의 피해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주변화된 이들이다. 예컨대 백인,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은 주로 혐오 발언의 가해자들이고, 흑인,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은 주로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서 혐오 발언을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혐오 발언자들은 과연 주권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가 보기에, 혐오 발언자들이 갖는 상상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혐오 발언을 창시한 기원적 혹은 주권적 저자가 아니라, 이미 생산된 혐오 발언을 자신의 담론 속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생적인 2차 저자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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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틀러는 “권력은 더 이상 주권적이지 않으며 도처에 있다”는 푸코의 견해를 원용해, “권력은 주체나 주체의 의도, 혹은 국가 권력과 같은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권력은 더 이상 주권 국가의 형태로 제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버틀러는 혐오 발언을 국가가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반대한다.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와 인종차별주의가 어떤 형태의 법적 규제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도 비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혐오 발언 화자의 ‘간접적 의도’를 ‘직접적 행동’으로 실천하고, 억압당하는 집단 구성원들을 종속하거나 주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마땅히 규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언어가 의도한 대로 행위가 되고,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주체를 열등한 지위로 재종속시킨다”는 그들의 견해를 ‘발언내행위론’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이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자신이 발언하는 순간에 말을 전달받은 자를 구성한다. 혐오 발언은 어떤 상처를 묘사하거나 상처를 결과로 생산하지 않는다. 혐오 발언은 그런 발언의 말하기에 있어서 상처 그 자체의 수행이며, 여기에서 상처는 사회적인 종속으로 이해된다.”
  버틀러는 “만일 우리가 혐오 발언은 발언내행위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또한 말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상처를 수행한다는 것을, 그리고 권력의 사회적 지형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한 마디로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모든 견해에 반대한다.
  그녀가 <혐오 발언>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행위하고, 심지어 상처를 주게끔 행위한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혐오 발언 규제 지지자들이 기술하는 꼭 그런 방식으로 언어가 말을 건네받은 자에게 직접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인 견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들은 혐오 발언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혐오 발언의 범위를 규정하고 혐오 발언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국가가 혐오 발언을 규제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혐오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버틀러는 국가에 혐오 발언 규제를 맡겨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혐오 발언을 해석하는데 있어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소수자 집단에 불리하게 혐오 발언 규제를 적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면, 국가의 혐오 발언에 대한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해석으로 혐오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은 더욱 커질 것이다.
  “만일 [어떤] 혐오 발언이 차별 행위로 간주된다면, [그] 혐오 발언은 법원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되며, 따라서 [그] ‘혐오 발언’은 법원이 그렇다고 하기 전까지는 혐오스럽거나 차별적이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혐오 발언이 있다고 판결하는 법원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런 법원이 없다면, 그 용어에 대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혐오 발언이란 없는 것이다.” 이처럼 혐오 발언을 국가와 법에 맡기려는 “규제 노력들은 공적으로 보호를 받는 표현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표현 간의 구분을 강제하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화”된다. 간명하게 요약하면, 버틀러는 의도치 않게 “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하고 또한 이를 편파적이고 때로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혐오 발언을 국가가 규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와 같이 국가가 혐오 발언을 규제하고 법으로 개별 혐오 발언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혐오 발언으로 비롯되는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혐오 발언을 한 개별 화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녀 역시 “말이 상처를 준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참이며, 증오로 가득 찬 발언, 인종차별 발언, 여성혐오 발언, 동성애 혐오 발언에 격렬히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혐오 발언의 책임은 역사적이고 관습적이기 때문에 개별 혐오 발언자만의 문제는 아니며,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녀가 생각하기에 혐오 발언의 권력을 분석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혐오 발언의 권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저항을 개별 주체의 몫으로 남겨둔다.
  혹자는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혐오 발언을 단지 개별주체들의 대처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방임 전략과 흡사해 보인다고 지적도 하지만, 버틀러는 혐오 권력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국가의 규제보다는 개별 주체의 저항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혐오 발언에 저항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청자, 즉 혐오 발언의 피해자가 기존 권력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혐오 발언의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격을 활용해 발언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 말하거나’(speaking back), 수행문이 도용과 기생에 취약하다는 점을 활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면 저항이 가능하다고 본다. ‘발언효과행위’, 즉 언어 행위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언어 행위로서의 언어 행위는 기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혐오 발언에 대한 이러한 반란적인 되받아쳐 말하기, 또는 기생적인 말하기는 역설적으로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를 침묵시킬 수 있다.
  언어 행위가 반드시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혐오 발언의 효력이 절대적이지 않고 전유와 전복에도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틀러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혐오 발언의 권력은 겉보기보다 덜 일방적인 것이며 불확실”하고 “발언이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의 의미는 어떤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변화되거나 탈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상처를 주고자 하는 그 말들이 자신들의 기호를 상실하며 의도된 것과 반대되는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요컨대 혐오 발언은 혐오 발언 수신자를 구타하고 열등하게 규정하고 그들을 침묵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항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고 전복적인 재인용도 가능하다.
  발언내행위론자들은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에게 모욕감과 상처를 주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강력하게 처벌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언어적인 상처는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발언뿐만 아니라 전달되는 방식, 즉 주체를 호명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의 효과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혐오 발언의 국가적 규제를 반대한다. 즉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불구로 만든다는 ‘발언내행위론’에 반대하고 대신 저항과 반항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발언효과행위론’을 제시한다.
  혐오 발언은 양가성을 갖는다. 즉 혐오 발언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넘어서는 일련의 효과들 또한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 이름에 단순히 종속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기 정의의 노력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주는 말에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맥락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그 말을 재전유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고, 혐오 발언에 대해 저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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