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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다시 쓰기, 읽기
제 925 호    발행일 :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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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검색창에 ‘소설 첫 문장’이라고 치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이 쭉 뜬다. 그 가운데 국내 소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는 첫 문장은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1)의 첫 문장이다. 주지하듯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어절로는 불과 네 개밖에 안 되고, 글자 수로는 열 자 남짓한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는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특히 ‘섬마다’에서 ‘마다’라는 조사 하나 때문에 작가의 고민이 더욱 깊었다고 한다. 분명 ‘섬마다’, ‘섬에는’, ‘섬에도’가 주는 느낌이 각기 다르다. 작가의 그런 깊은 고민 때문인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하지만 어떤 소설은 작가의 고민과 사색보다는 날카로운 직감과 본능으로 첫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의 첫 문장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방인>은 작품 그 자체로 보나 20세기 서사 형식의 역사에 있어서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품으로 출판 당시부터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롤랑 바르트와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이방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이방인>은 오늘날 프랑스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방인>은 다른 서양 고전과 달리 부피가 얄팍하다. 그럼에도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그 자체의 애매함, 기이함, 신비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서 오히려 그 점이 작품에 변함없이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이방인>은 ‘고전은 늘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당위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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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것처럼 <이방인>의 첫 문장이 직감과 본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소설 전체도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카뮈는 <이방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정확한 계획을 세웠다고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밝혔다. 즉 <이방인>은 ‘부정’(否定)을 표현한 소설 형식으로 처음부터 계획되었다. 그리고 착상, 구상, 집필 과정은 순수한 창작보다는 그의 삶의 궤적과 일치한다. 예컨대 1937년은 카뮈의 삶에서 중요한 해이다. 1937년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젊은 카뮈가 장차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해 그는 첫 번째 아내 시몬과 공산당원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게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자격 시험도 응시할 수 없었다. 그는 폐결핵 치료와 요양을 하면서 자기 삶의 전반에 대한 근본적으로 재반성하고 세계관을 재확립한다.
  카뮈의 세계는 삶의 기쁨과 죽음의 전망, 빛과 가난, 왕국과 유적 긍정과 부정 등 ‘안과 겉’의 양면이 언제나 맞물리어 공존하는 세계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은폐하거나 제외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어둡고 비극적인 또 다른 면을 뚜렷하게 의식했다. 삶의 종점인 희망 없는 죽음은 그에게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했다. <이방인>은 바로 이 허무감의 표현인 동시에 그 허무감에 대한 저항의 결과물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알제의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인 뫼르소는 마랑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마랑고로 간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감한 그의 태도에 양로원 사람들이 놀란다. 장례식 다음 날 그는 해변에서 옛 사무실 동료 마리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 평범하고 무심한 일상에서 그는 어느 날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과 친구가 되는데, 그와의 관계가 그의 삶의 일상적 흐름을 끊는 계기가 된다. 뫼르소는 변심한 아랍인 애인을 벌주려는 레몽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며칠 후 레몽, 뫼르소, 마리 일행이 레몽의 친구 마송의 초대로 해변으로 놀러 갔을 때 그들과 그들을 미행한 레몽 애인의 오빠 일행과 싸움이 벌어진다. 레몽이 다치고 싸움은 끝났으나 뫼르소는 답답한 마음에 혼자 그늘진 샘을 찾아간다. 하지만 샘에는 이미 레몽 애인의 ‘아랍인’ 오빠가 와서 그늘 속에 누워 있다. 팽팽한 대치 속에서 아랍인이 칼을 꺼냈고,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먼 뫼르소는 자신도 모르게 레몽으로부터 빼앗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2부는 뫼르소의 재판과정을 담고 있다.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판을 관찰 혹은 구경한다. 예심과 본심에서 그에게 주로 쏟아진 질문은 아랍인 살해 경위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 뫼르소의 행동 하나하나가 스캔들을 일으킨다. 사실 당시 프랑스인의 아랍인 살해는 프랑스 법정에서는 치명적인 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살해한 아랍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단지 아랍인으로만 지칭될 뿐이다. 뫼르소가 법정의 질문에 요령 있게 답했다면, 아니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랐다면 그는 사형선고를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법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즉 거짓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뫼르소는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인간이기에 극한의 공포를 느꼈지만, 그는 마침내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방인>은 구조적으로 주인공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를 중심으로 1부와 2부가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1부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로 끝난다면, 2부는 뫼르소가 아랍인의 살해에 대해, 더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사형 판결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많은 이들이 <이방인>이 주인공 뫼르소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작품 속에서 그의 사형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무모한 상상을 한번 해 본다. 어쩌면 무례한 상상일 수도 있다. 만일 <이방인>의 뫼르소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이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회개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당시 프랑스에서는 식민지인을 살해하는 것은 큰 죄가 아니었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무죄가 될 수도 있다. 그가 종교적. 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철회되거나 아니면 형 집행이 유예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당방위로 무혐의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카멜 다우드는 <뫼르소, 살인사건>(조현실 옮김, 문예출판사, 2017)에서 <이방인>의 ‘뫼르소가 죽지안았다면’이라는 무모하고 무례한 상상을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방인>의 첫 문장을 패러디해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로 시작한다.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독자의 호기심을 끌 만하다. 따라서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 다시 쓰기/읽기’ 혹은 ‘<이방인> 되받아 쓰기’로 규정 가능하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뫼르소, 살인사건>은 작가 카멜 다우드의 첫 장편소설로서 출간 즉시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심지어 이 작품은 연극으로 각색되어 아비뇽 축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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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르소, 살인사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매일 저녁 70대 후반의 한 노인이 바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술에 취하면 두서없이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던 알제리의 고뇌, 알제리 독립 전쟁(1954-1962)의 정황, 졸지에 형을 잃은 소년과 아들을 잃은 엄마의 처절한 투쟁과 허망한 좌절, 독립 이후의 알제리에 대한 치열한 비판, 종교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그의 옆에서 그의 부서진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노인은 뫼르소라는 프랑스인에 의해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 하룬이다. 뫼르소는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갑작스러운 심경변화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석방되었다. 사실 그가 석방된 이유는 아랍인 살해에 대해 뉘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의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뉘우쳤기 때문이다. 석방 뒤 뫼르소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범죄 이야기를 <타인>(<이방인>의 패러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뫼르소에 대한 분노와 형에 대한 연민은 하룬을 평생토록 지배해온 상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노와 연민을 잊기 위해 늘 술에 취해 있다. 하룬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뫼르소의 <타인>에 대해 논문 준비를 하느라 자료 수집 차 멀리 프랑스에서 알제리 오랑까지 온 대학원생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늘 갈구해온 하룬은 그 프랑스 청년에게 다 털어놓음으로써 형의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으로 말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명확하지 않다. 내용도 불분명하다. 그가 말하는 목적은 한 가지다. “권태와 눈부신 햇살과 찝찔한 소금기” 때문에 살해된 형, 이름 한번 불리지 않고 단지 ‘아랍인’으로 호명된 그의 형을 제대로 된 이름, 즉 “무싸”로 호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하여 그에게 집착하던 하룬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분노하던 뫼르소와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 닮았음을 깨닫는다. 뫼르소가 자기 조국이 아닌 땅에서 고아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하룬 역시 죽은 형이 살아오기만을 바라는 엄마 곁에서 살았어도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뫼르소가 대낮에 햇빛 아래서 ‘아랍인’을 살해했듯이, 하룬은 한밤중에 달빛 아래서 ‘프랑스인’을 똑같이 살해한다. 또한 뫼르소가 살인 자체보다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처럼, 하룬은 프랑스인을 죽였다는 살인 행위보다도 프랑스인을 죽인 시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즉 그는 프랑스인을 알제리 독립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죽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뫼르소와 하룬은 똑같이 종교를 부정하고 ‘자유의지’로 자신의 존재를 책임지겠다고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이방인>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사형수’로서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포일’(foil)이며 거울이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이 무의미하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방인>은 ‘비극적인 삶의 찬가’다. <뫼르소,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뫼르소, 살인사건>이 <이방인>의 패러디로 시작했다면 결말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구경꾼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절망적 환희’로 끝난다.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의 속편으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본적으로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룬의 독백은 <이방인>의 구절을 그대로 혹은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한 마디로 작가 카멜 다우드는 <뫼르소, 살인사건>에서 <이방인>을 재문맥화한다. 그럼에도 두 작품은 궁극적으로 통한다. 예컨대 하룬은 처음에는 뫼르소에게 분노하고 증오심을 갖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뫼르소와 상당히 닮았음을 깨닫고 연민 또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그렇다면 작가 “카멜 다우드도 알베르 카뮈에 대해 야속함과 동시에 찬탄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고 있음을 느낀다”는 옮긴이의 설명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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