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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서구 사상사의 동향과 우리 학문의 기회
제 810 호    발행일 : 2009.11.17 
서구 사상은 새로운 출구 찾기 위해 암중 모색 중
서구적 자기 비판의 한계 극복 가능성은 우리로부터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김귀룡 교수

 

나는 지금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학문의 길로 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동양의 한 구석에 위치한 우리가 지침으로 삼을 만한 학문의 방향이나 역할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먼저 21세기의 지적 풍토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우리의 학문적 잠재력을 캐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서구문물이 맹위를 떨치고 있기는 하나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구의 사상은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서구 사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지성인들이 19세기부터 서구 사상에 대해 내리고 있는 진단이다. 더 나아가 1,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인들은 서구사상의 뿌리인 이성중심주의의 폐해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서구정신의 몰락과 위기를 진정으로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명의 뿌리에 대한 서구 지성인들의 근본적 비판 작업은 완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서양의 현대 철학자들은 근대의 실체나 자아 중심의 철학, 더 나아가서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철학과 그것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을 가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서양적 인간형을 실천적 존재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사유하는 인간은 자기의식 속에 갇혀 있는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존재, 곧 소외된 존재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자연적 힘들과 생명력을 갖추고 활동하는 자연적 존재이다. 그런데 서구인들이 이론적 사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실천적 존재인 자연적 인간을 말살하고 자연과 유리된 소외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서구의 전통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본래적인 실천적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싸르트르는 서양적 사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참 실존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타성에 젖어 있는 폐쇄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방적으로 개척할 것을 요구한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는 새로운 것의 창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의식의 부정성을 통해 스스로를 미지의 것 앞에 던져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 실증주의자들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언어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것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모두 사이비 문제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인간의 사유에 혼란만을 불러일으키는 서양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명제들은 그것의 참·거짓 여부가 검증될 수 없는 무의미한 언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서양의 전체 철학사가 과학적 검증가능성을 기준으로 원천부터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쓰임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영역과 말할 수 없는 영역을 엄격하게 나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과 존재론 등은 말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생각을 질병에 빠지게 만들어버린다. 철학적 문제에 빠져 있는 철학자들은 문제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문제들에 매달려 있는 일종의 환자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서양적 사유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성이나 동일성, 목적, 완결 지향성을 떨치고 그런 지향이 자체 안에 언제나 비결정, 미완결 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요 작용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철학적 사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 본질, 실체, 형상, 동일성, 그리고 더 나아가 현존의 개념이 불가피하게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서양의 지성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서구적 전통의 뿌리를 엄정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21세기는 비판과 해체, 도전이라는 지적 풍토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도전에 의해 서양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더욱 강한 연습 상대자를 요구함으로써 실력을 향상시키는 권투 선수처럼 비판이 강화되면 될수록 전통 학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실증주의자들은 전통 철학의 핵심에 있는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등을 무의미한 언명으로 치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비판 정신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그 비판적인 면은 사라지고 검증 기준으로서의 경험을 이론의 긍정적인 근거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전통적 사유를 보다 확실한 기초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또 마르크스의 사상은 처음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통째로 전복시킬 정도로 혁명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체질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자기반성의 역설에서 찾을 수 있다. 자기반성의 역설이란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 반성을 하지만 그것에 의해서 오히려 자신이 강화되는 상황을 말한다. 자기반성이란 반성하는 주체와 반성당하는 또 다른 자기(대상으로서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 자기반성의 과정에서는 반성 당하는 나는 문제가 발견되어 극복되지만 반성하는 나는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자기반성은 오히려 자기를 강화시킨다.
서구적 전통 안에서 자기 전통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서구의 지성인들도 이와 같은 역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자신이 서구적 전통 안에 속하여 서구적 사유양식을 따르면서 서구적 사유를 극복하고자 하기 때문에 반성의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서구의 전통적 사유를 강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나 사유는 그것들 내부에서 야기되는 비판에 의해서 무기력해질 수 없다. 이성을 통해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은 이성의 기능을 강화시켜준다. 자기비판이나 내재적인 비판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지 스스로가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방식일 수는 없다.
결국 21세기 서구 사상사의 동향은 스스로의 지적 전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전통 내부에서 가해지는 비판의 한계 때문에 완전히 극복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사상사의 이런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다보면 의외로 우리 고유의 사유방식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선 언급할 만한 점은 두 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우리가 고난과 역경을 많이 겪은 민족이라는 점일 것이고, 둘째는 고립된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심하게 꺼려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첫 번째만을 살펴보고 둘째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서양의 학문적 태도에는 자비의 원리 준수(observance of principle of charity)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자기의 이론이나 원칙과 어긋나는 주장이 있을 경우, 이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나름대로의 진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원리이다. 이론에 비해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는 마르크스도 이론중심적인 서구 철학사를 처음부터 무시하지 않는다. 서구의 사상이 이론적 추상성에 매몰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보고 그 근원을 캐고 들어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들어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자비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할 때 상대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나 이유를 캐보고 그걸 토대로 상대의 이야기를 논박한다. 이런 점에서 자비의 원리는 서양 학문의 양식(conscience)으로 평가할 만하다.
근대 이후의 서양 사상이 이루어 놓은 성과는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문제점을 넘어서고자 하는 위기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성공의 경험은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주변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를 실제로 겪고 있다. 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비판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비판이란 자기 스스로 하는 것보다 남의 비판이 더 아픈 법이다. 곧 자기 비판은 타자(他者)에 의한 비판보다 강력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자들이 내세우는 자비의 원리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승자의 자비는 남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아량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의 이야기가 자신의 뿌리마저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아프다면 승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남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산다.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타자가 훨씬 무섭다는 걸 먼저 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결함을 찾아 고치고자 한다. 이는 자기를 통해서 자기를 넘어서려 하기보다는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넘어서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타자에 의한 자기비판이 생활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서구의 지성인들이 봉착하고 있는 자기비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남의 이야기가 자기의 뿌리를 흔들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에 못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강한 법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급급한 사람은 자신을 내던지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 새로운 인식의 장은 보다 철저한 비판을 토대로 열리기 마련이다. 가장 철저하게 비판하는 자가 가장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빗대어서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아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각이 생길 수 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구 지성인들이 봉착하고 있는 자기비판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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