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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추사인가? 종이에서 돌로
제 814 호    발행일 : 2010.03.15 


 
 

1980년대만 해도 김정희의 추사체는 서예계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던 비원 앞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에서도 왕희지나 그를 주종으로 삼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주를 이뤘고, 기껏해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안진경체가 그 뒤를 이었다. 심지어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들조차 추사체에는 무심했다. 그런데 어쩌다 추사체가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가? 김정희는 24세 때 북경에 간다. 동지겸사은사부사(冬至兼謝恩使副使)인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직분이었는데, 이 때 그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하나의 문화운동을 목도한다. 그것은 바로 비문(碑文)의 글씨를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종이에 쓰는 첩문(帖文)보다 돌에 새겨진 비문이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글씨가 돌에 쓰였던, 종이에 쓰였던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다. 오히려 종이에 쓴 글은 진본일 수가 있지만, 돌에 새긴 것은 한 번 옮기는 과정을 겪으므로 진품보다 못한 차등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종이에서 돌로 옮겨가고자 했다. 종이에 쓰인 글씨보다는 돌에 새겨진 글씨를 더욱 좋은 것으로 보고 그 글씨를 배우고 익히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
청나라 말기의 분위기는 이랬다. 외세 열강에 대항할 방도가 없는 중국, 문약해빠진 식자들, 임금이 아무리 한족의 문화를 존숭해도 자신들의 전통에 대해 깊어지는 회한, 관념적인 사상들이 보여주는 사상누각 같은 이론과 주장, 따라서 보이지 않는 출구…. 이때 학자들이 마침내 찾아낸 것이 위대한 통일제국였던 한(漢)나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한나라는 중국을 대변한다. 왕망이 잠시 14년간 단절시켜서 그렇지 전한(서한)과 후한(동한)을 합쳐 400년가량 되니 중국역사를 통해서는 정말 긴 왕조였다. 알다시피 중국왕조는 대체로 200년을 주기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한문(漢文), 한자(漢字), 한시(漢詩), 한학(漢學), 한약(초창기 한약방은 ‘韓藥’이 아닌 ‘漢藥’으로 썼다) 등등, 한은 중국을 대표한다.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 왕조는 당나라이다. 외국의 차이나타운이 그들의 용어로 ‘당인가’(唐人街)로 표현되는 것은 그만큼 당의 위세가 당당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현재의 마포 절두산 성지 근방을 당인리(唐人里)라 불렀고 그곳에 당인리발전소(현재의 서울화력)도 세운 바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당조는 290년에 그친다. 게다가 당은 문화적 전성기였긴 하지만, 한처럼 문화적 정립기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한은 시종 중국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치 나이도 많지 않고 능력도 모자란 유비(劉備)가 한 나라의 종실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덕장, 용장, 그리고 지모를 모두 거느릴 수 있던 것처럼. 그래서 한에 대한 자각과 모사는 중국인들에게는 늘 고향에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담는다.
흔히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을 이야기하면서 만주족 정부 밑에서 이념적 발언을 할 수 없는 한족 지식인의 역사의존적인 구태의연한 학문태도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이를 통해서 한족의 영광과 자긍심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의 고증학이 곧 금석학(金石學)과 연관되는 연유이다.
금석학은 말 그대로 ‘쇠와 돌’의 학문이다. 그런데 쇠와 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쓰인 글씨가 중요했다. 그 글씨가 당나라 이후 유행하던 왕희지체와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동진 사람인 왕희지는 그의 글씨를 서진의 여류서예가인 위 부인에게서 배운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유려(流麗)하다. 한마디로 예쁘다. 그래서 전아(典雅)하다는 등, 비교적 아름다움과 관련된 여성적 평가가 많다. 당태종은 그의 글씨를 너무 좋아해서 죽을 때도 관에 넣어갔다고 할 정도로 당 이후 왕희지체는 모범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청대의 지식인들이 그의 글씨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식자들에게 왕희지와 그를 이은 송설체 등이 너무 유약하게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고 했던가? 그런 글씨를 쓰는 사람조차 약해빠질 것을 그들은 염려했다.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섞어 막말로 말하자면, 계집 같은 글씨를 쓰는 문자공작자(literati)들이 무슨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수 있겠느냐고 깊게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나라를 버리고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나름대로 명분도 분명했다. 종이에 쓰인 글씨는 종이의 수명 때문에라도 여러 번 베껴 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진적여부가 확실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돌에 쓰인 글씨는 비록 한 번의 모각을 거치더라도 진적에 가깝다. 따라서 돌에 새겨진 글씨를 쓰는 것이 좀 더 원작에 가까운 작품성이나 필력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쇠에 새겨진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청동기에 새겨진 동정문(銅鼎文)은 전서(篆書)로 쓰였기에 인장을 제외하고는 평소 쓰는 글씨로는 활용도면에서 많이 뒤쳐진다. 따라서 돌에 쓰인 예서(隸書)를 중심으로 글씨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서는 진나라 때 재상이었던 이사가 각양각색였던 당시의 문자를 통일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고, 예서는 노예의 예자가 쓰인 것으로 보아 좀 더 쓸모 있게 변형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예서는 오늘날의 한자이자 표준문자체라는 의미를 지닌 해서(楷書)와 비슷하기에 서체변형운동의 표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지식인들은 이런 정신 속에서 돌에 쓰인 한나라 비문이 첩보다 열 배나 낫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돌에 새긴 비문과 종이에 쓴 첩문의 가장 큰 차이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에 있었다. 서예용어로는 모난 글씨인 방필(方筆)이 비문이라면, 둥그런 글씨인 원필(圓筆)이 첩문이었다. 오늘날 용어로 표현하면 강하고 힘찬 글씨가 비문이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글씨가 첩문이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에서 남성적인 힘참에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십대 중반의 김정희는 북경 곧 당시의 연경(燕京)에서 이러한 지식인들의 의지를 여러 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숙지한다. 그리고 이를 조선에다 실현코자 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은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이 10년이 넘는 귀양살이였다. 제주도에서 그에게 내려진 처벌은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서 꼼짝 말기’(圍離安置)였다.
김정희가 모범으로 삼았던 중국의 학자가 바로 완원(阮元)이었고, 따라서 그의 호조차 그를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완당’(阮堂)으로 삼았던 것이다. 재밌게 말하자면, 칸트를 존경해서 자신의 호를 ‘칸당’으로 삼는 것과 같다. 그 둘은 이후에도 서신을 통해 학문적 교류를 지속했다. 현재 완역된 ??완당집??의 일정 부분이 완원의 대표적인 저작인데도 김정희의 것으로 취급된 것은 그 둘의 관계를 모르는 데도 비롯된 명백한 오류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희가 중국의 문화운동을 수입하는 데만 급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함흥의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풀이해내고, 무학대사의 것으로 여겨졌던 북한산 비봉의 석비를 진흥왕순수비로 밝혀낸 것도 이런 ‘돌’ 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그 덕분에 진흥왕순수비 탁본은 북경에까지 전해져 좋은 글씨로 평가되기도 한다. 완원과 서신을 왕래하던 과정 중에 조선의 글씨가 중국에까지 소개되는 것이다.
추사체가 예서에 가깝다는 것, 남성적 필치가 농후한 것, 기교보다는 기개를 우선시한 것, 가까운 전통보다는 오래된 전통을 추구한 것, 숨어있던 한국미의 고졸(古拙)함을 드러낸 것, 그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다.
왕희지도 한나라의 예서체를 연구했다는데, 그렇다면, 김정희와 완원은 전범(典範)의 전범을 연구한 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한나라는 우리에게 신라인가, 백제인가, 아니면 고구려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고조선과 발해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 스승의 스승은 누구인가를 묻고 싶다.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사상의 변혁을 말할 필요도 없다. 문체만 바꾸어도 사상이 바뀐다. 형식화된 문체에서 자유로운 문체로 바뀌면 그 속에 다른 생각이 자연스럽게 담기게 된다. 그런데 우리보다 한 세기 전 이 땅에 살았던 어느 지식인은 문체도 아닌, 단지 서체만 바꾸어도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현대의 문명비판가들은 필기구의 변화만으로도 사고의 전환이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펜이 아닌 타자기에로의 전이가 여성을 사회에로 진출시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차 대전 때 활약하던 여성타자수를 생각해보라. 과연 우리에게 그런 변환은 무엇일까?
김정희가 북경에 들렸을 때, 천안문 남쪽 전문(前文) 근처의 예수회 신부들이 살던 교회에도 들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부들 가운데 이탈리아 출신의 낭세령(朗世齡, Giuseppe Castiglione)은 김정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그림은 내용은 동양화이면서도 형식이 서양화인 퓨전 기법을 담고 있다. 당시의 북경은 전세계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이는 오늘날의 뉴욕과 비슷했다. 나는 우리 학교가 언젠가는 그런 문화운동의 중심이 되리라는 꿈을 갖고 있다. 작은 사상일지라도 현실화될 때, 그것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다.

vitmpq    2010-12-10 1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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