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일제 강점기 36년을 경험한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만행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사왜곡을 통해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왜 그런 만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동방의 작은 섬나라였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열강과 어깨를 겨누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을 침략했고, 나아가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논리와 과정을 거쳐 조선을 침략했을까?
일본, 왜 조선을 침략했나

메이지(明治)정부 초기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중심으로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메이지 정부 성립 후 일본은 조선에 왕정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국서를 보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종주국에서만 사용하는 ‘황(皇)’, ‘봉칙(奉勅)’이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국서의 수리를 거부하였다. 정한론의 제창자들은 조선이 일본에 대하여 무례하다는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그 이면에는 신정부에 대한 불만의 화살을 조선침략에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힘을 축적하여 전력이 충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며 시기상조”라는 반대파 주장에 정한파는 패배하였다. 이는 정한론의 포기가 아니라 유보였다.
메이지 지도자들은 냉혹하게 제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외세에 종속될 뿐 중립은 불가능하다는 지정학적 논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보기에 비 서양사회는 서양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들을 모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아시아 외교중심에는 항상 조선이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구미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청과 조선에 접하고 있는 러시아의 대두를 특히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조선이 러시아의 세력하에 들어가면 일본의 국가적 독립도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러시아 위협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전에 일본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영향력하에 두어 열강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이상론이 생겨났다.
1876년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자국에 했던 것과 똑같이 군함외교술을 동원 조선을 개항시켰다. 일본의 상인들은 주로 일본에 수입된 유럽산 공산품을 조선에 되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창출했고, 조선으로부터 쌀과 콩을 수입하였다. 1870년대 조선 수출물량의 90%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목표는 중국과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일본의 말을 잘 듣는 조선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메이지 헌법과 군국주의

프로이센의 헌법을 참고로 만들어진 메이지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도로 1889년 2월 11일 공포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하였다.
메이지 헌법을 기초한 메이지 지도자들은 정치적 이견이 국가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선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토는 “극히 민주주의적인 이념이 쳐들어오는 것”은 저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과 같이 땅의 크기와 인구가 왜소한 나라는 조직의 완전한 단결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의 결과로 메이지 헌법은 천황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법률의 제가, 공포, 의회의 소집, 개폐, 선전포고, 강화, 조약체결, 군대의 통수권, 국무대신의 임명 등을 천황의 권한을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
반면 국회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재정에 있어서도 경상 지출 중 일부 주요항목들은 국회의 심의사항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정부는 전년도 예산에 준해서 집행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결국 국회는 내각을 통제하여 국가 정책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하는 제한된 국회에 지나지 않았다.
국회는 이원제로 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중의원(衆議院)과 황족, 화족(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 외에도 고액 납세의원으로 구성되는 귀족원(貴族院)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직접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하는 만 25세 이상의 남자, 곧 부자 남자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유권자는 전체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메이지 헌법의 특징은 ▲ 천황에게 광범위한 통치권을 부여 ▲ 전쟁선포와 강화 및 조약체결을 천황에게 부여 ▲ 천황만이 헌법개정 발의 ▲ 천황의 직속인 참모본부(參謀本部)와 군령부(軍令部)를 내각과 분리로 정리할 수 있다.
메이지 헌법에 기초한 일본의 정치운영은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들과 유력 정치가로 구성된 원로(元老)들이 천황의 최고상담 상대로서 실질적으로 천황을 대행했다. 그러나 다이쇼(大正) 일왕 이후 원로들이 사망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운영에서 내각, 의회, 군부 등으로 권력이 분산되어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천황을 명목으로 내세워 군부의 지배력이 강화된 일본의 군국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달콤한 전쟁의 유혹
일본이 조선을 압박한 시점은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려는 프로젝트의 추진과정과 맞물려 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초에 일본정부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을 증강하기 위해 투자했다. 게다가 군통수권 체계는 메이지 헌법에 의해 대중이나 의회의 간섭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체계로 확립되었다. 독일식 모델을 모방하여 장교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와 천황 직속의 참모본부를 창설하였고, 작전 명령권은 총리는 물론이고 육해군대신으로부터도 상당한 독립성을 확보하였다. 일본정부는 팽창주의가 국민을 단합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국내의 지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에 나섰다. 전쟁은 정치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일본에 많은 혜택을 주었다.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으로 촉발된 청일전쟁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의도에 부합하였다. 청일전쟁에 대한 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의 대가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무려 3억 6,000만 엔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 액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3년도 일본예산의 약 4.5배에 해당했다. 보상금의 대부분(3억 엔)은 군비로 지출되었다. 간접적인 이득도 상당했다. 군수품 조달은 무기생산과 관련된 산업의 성장에 일조했다. 보상금 덕분에 예산부족의 부담을 던 일본정부는 해운업과 조선업에 거액을 투자할 수 있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3국(러시아, 독일, 프랑스) 간섭과 을미사변으로 조선에서 수세에 몰린 일본의 지도자들은 조선에서 주도권을 되찾고 아시아의 제국주의 세력으로 우뚝 서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1900~1901년 일본은 단일국가의 파견병력으로는 최대 규모인 1만 명의 군대를 중국에 파병하여 의화단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다국적군에 가세했다. 일본은 의화단운동 진압 후 열린 강화회의에 다른 열강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했고, 베이징 인근에 ‘평화유지군’을 상주시킬 권한을 획득했다. 이즈음 일본은 영국과 가까워졌고,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중국에게 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과 영국은 1902년 동맹을 맺고 협력관계를 공식화했다. 이 합의에 따라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양국은 러시아나 다른 나라가 일방을 공격하면 서로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그러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고 베이징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아시아를 노리는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씁쓸한 승리와 조선의 병합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조선에서의 패권을 공고히 할 방책에 골몰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호의적으로 검토되던 안은 러시아와의 외교적 협상이었다. 러시아가 조선에서 물러난다면, 일본은 만주의 지배권을 러시아에 넘겨준다는 조건이었다. 1903년까지 양국 정부는 모두 협상에 무성의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만주의 지배권을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러시아도 조선에 계속 머물기를 고집했다. 게다가 정당, 언론인, 도쿄 제국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유력 지식인들은 집회를 갖고 전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일본협상단 사이에서 강경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1904년 2월 일본정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조선은 물론 만주에서의 입지를 굳히기로 결정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만주로 북진하며 치른 지상전에서 연승을 거뒀다. 일본은 1905년 1월, 6개월간의 포위공격 끝에 랴오둥 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旅順) 항을 함락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일본해군이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퇴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완패시키지는 못했으며,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도 컸다. 일본군의 군수물자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자금도 부족했다. 러시아로서도 국내 혁명의 위기로 인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만철 부설권을 얻었고 만주의 두 항구인 여순과 대련(大連)에 대한 조차권도 넘겨받았다. 또한 조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이 살지 않던 사할린 남부 영토에 대한 권리를 제외하면, 일본은 이렇다 할 땅도 얻지 못했고 재정적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결과와 뚜렷이 대조되었다. 일본의 여론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조선은 확실히 일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합방되었다.
전쟁에 흥하고, 전쟁에 망하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조선과 만주에 세력을 뻗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에 따라 군비을 더욱 확충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고, 일본 정부는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입헌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헌정수호 민권운동이 일어나는 등 정국도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재정난과 혼란은 결국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극복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제품들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일본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1914~18년 사이에 일본의 산업 생산고는 14억 엔에서 68억 엔으로 증가했다. 일본산 면직물의 해외 판매는 이 기간에 185%나 신장했다. 또한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하여 중국에 있던 독일조차지의 철도 및 군사기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호황은 세계대공황을 전후하여 국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은 위기 극복을 위해 더욱 군국주의화하였고, 전쟁에 대한 달콤한 기억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을 인도했다. 결국 일본은 전쟁으로 흥하고, 전쟁으로 망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충북대신문학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