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된 이후부터 1965년 외교정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과 일본은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외교적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도 나름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하기 위해 노력 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입장 차이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당시의 입장 차이는 지금의 한일갈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현재의 한일관계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1951년 연합국이 일본을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열린 회의이다. 미국은 1947년 초부터 대일강화조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재무장, 배상문제, 영토문제, 중국의 대표성 문제 등에 대한 이견으로 조약체결이 지연됐다. 미국 내에서는 특히 국무부와 국방부 간에 대립이 심각했다. 국무부는 조기강화를 원했던 반면 국방부는 미군의 철수나 감소로 인해 발생할 동아시아의 안보적 위험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갈등은 대일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협정을 동시에 체결하는 것으로 해결되어 강화회의가 추진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대일강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이 대일강화회의에 연합국 자격으로 조약 서명국이 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하게 됨으로써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청구권 문제와 영토 문제,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보장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유리해진다. 둘째는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심리적 피해보상과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은 강화조약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패전 직후 외무성 조약국이 중심이 되어 1945년 외무성 안에 ‘평화조약문제연구간사회’를 설치하였다. 간사회의 임무는 평화조약문제에 대한 연구와 대응책 강구였다. 일본의 주권회복, 안전보장, 전후배상과 함께 영토문제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검토됐다. 특히 포츠담 선언에서 언급한 ‘일본이 침략에 의해 취득한 영토’의 범위를 부당하게 확대해석 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일본은 오키나와, 오가사와라, 쿠릴, 하보마이, 시코탄 등이 역사적.지리적.민족적.경제적으로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려 7권의 자료집을 만들었다. 또한 일본은 연합국, 특히 미국 정부의 수뇌부 및 민간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의 실상(패전으로 영토의 45% 상실, 인구 증가, 중요 공업시설 파괴 및 노후)을 인식시키려 노력했다. 이 모두는 영문 자료로 준비되어 대일강화조약을 준비하고 있던 미국 실무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에 반해 한국은 치밀한 자료준비 없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51년 한국 측은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하여 미국 측에 5개항의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 한국을 대일전에 참가한 교전국으로 인정할 것 ▲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정부 소유, 개인 소유를 불문하고 모든 재산 요구권을 포기할 것 ▲ 한국을 대일강화조약의 조인국으로 할 것 ▲ 한국과 일본 간의 어획수역을 명백히 결정할 것 ▲ 대마도.파랑도(이어도).독도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국 소유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은 요구권을 포기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요구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과의 교전국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일본의 군사력에 공헌했으며, 미국이 한국의 제반 이익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1년 9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52년 4월부터 조약은 발효되었다. 이로써 미군의 일본 점령 통치는 끝나고 일본은 다시 자주 독립국이 되었다. 미국이 이처럼 일본을 배려한 것은 미소관계가 냉전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갖는 기지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1949년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여 미국이 선택한 동아시아의 동맹자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나고,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점차 미국은 대안적 선택으로 일본을 동반자로 보게 됐다.
한일회담 개막과 청구권 문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한국과 일본 간의 현안 문제에 대한 직접협상 필요성이 제기됐다. 즉, 양국 간 어업경계선 역할을 해오던 ‘맥아더 선’의 폐지로 이에 대한 재설정이 필요했고, 재일 한국인 문제도 시급했다. 또한 본격화된 냉전도 한일 국교정상화를 요구했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대공봉쇄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동아시아의 대공봉쇄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을 더 이상 무국교국으로 둘 수 없었다.
마침내 미국의 알선으로 1951년 10월 한일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이 개막됐다. 그러나 회담은 청구권문제와 어업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 결렬되고 말았다.
한국정부는 장기간의 식민통치 기간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에 대해 일본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일청구권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의 배상책임이 면제되었음을 전제하며 한국의 과도한 배상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또한 대한청구권을 협상카드로 제기하여 대일청구권을 완전 상쇄시키거나, 적어도 부분 상쇄를 통해 대일청구권을 최소화시키려 했다. 일본의 대한청구권이란 갑작스런 항복으로 한국에 남겨 두고 간 일본정부 혹은 일본인 소유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말한다. 한국은 설사 일본의 대한청구권 주장이 교섭 목적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는 일본과 협상할 성질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어업분쟁과 평화선
전후 앞선 어업기술과 선진장비를 가진 일본은 빈번히 한국어장을 침탈했다.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일본 어선들의 무분별한 남획을 방지하기 위해 어업 제한선을 공표하는데, 이것이 ‘맥아더 선’이다. 그러나 일본 어선들은 여전히 맥아더 선을 침범하여 한국어장에서 조업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한일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맥아더 선마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사라지게 되었고, 한국은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을 선포한다.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불린 평화선의 정식명칭은 <국무원 고시 14호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선언>으로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유지된다. 이승만 정부의 일방적 평화선 선포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어업자원 보호이다. 한국어장에 대한 일본 어선들의 무분별한 남획을 막기 위해 한국은 맥아더 선의 유지를 바랐지만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면 맥아더 선은 폐지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한국은 평화선 선포를 통해 미국에 맥아더 선 존속을 요구하는 한편, 폐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대안조치를 취한 것이다.
둘째, 한일 간 어업분쟁 방지와 어업협정 체결을 염두해 둔 조치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9조는 일본이 관련 국가들과 조속한 시일 내에 어업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평화선 선포를 통해 일본에 어업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한편, 협정 체결 이전까지라도 한일 간 어업분쟁을 방지하고자 했다. 더욱이 제1차 한일회담 개막을 앞둔 시점에서의 평화선 선포는 일본의 성의를 촉구하는 협상수단이었다.
셋째, 영해와 대륙붕의 자연자원에 대한 보호와 주권행사였다. 1945년 9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대륙붕에 관한 선언>과 <미국 주변 공해의 일정수역에 있어 어업에 관한 정책>을 선언한다. 전자는 미국 연안 대륙붕의 천연자원을 미국에 귀속시키고, 타국과 공유되어 있는 경우 관계국과 협의하여 경계선을 설정하며, 공해 자유항해원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후자는 어족자원을 보호해 공해상 어업의 지속적인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해의 일정수역에 어업보존수역을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선언을 시작으로 멕시코, 칠레 등 중남미 국가들이 대륙붕상의 주권과 어업관할수역 설정을 선언했고, 이승만 정부도 이에 시사를 받아 평화선을 선포했다.
일본정부는 평화선 선포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발하였다. 첫째 공해상까지 주권을 확대해 영해 확장을 도모했다. 둘째 한국의 일방적 조치다. 셋째 일본 영토인 독도를 침범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은 물론 소련, 중국, 대만, 호주 등과도 어업분쟁 중이었고, 이들 국가들이 한국의 평화선에 우호적 입장을 보임으로써 국제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제1차 회담 결렬 후 한국의 평화선 고수와 일본어선 나포 경고에 일본은 순시선 파견계획으로 맞대응하여 평화선 수역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에 1952년 9월 UN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는 군사상의 이유로 ‘방위수역(Sea Defense Zone)’을 선포한다. 이 ‘클라크 선’으로 불리는 이 방위선은 한일 간 어업분쟁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선포 이후에도 일본어선들의 침범은 계속되었다. 한국은 1952년 10월 평화선과 클라크 선을 침범하는 어선들을 나포하라는 <긴급명령 제12호 포획심판령>을 공포하고, <대통령령 제77호>를 통해 부산에 ‘포획심판소’를 설치하여 나포어선의 재판을 합법화하였다.
결실 없는 한일회담
한일 간의 분쟁조정을 원했던 클라크 UN군사령관의 주선으로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이 재개됐으나 여전히 청구권과 어업문제 대한 양국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끝났다. 제2차 회담 결렬 이후 제3차 회담이 재개되기 전까지 한일 간 어업분쟁은 점점 고조되었다. 특히 그동안 임시로 어업분쟁의 경계선 역할을 해온 클라크 선이 1953년 8월 해제됨으로써 양국의 분쟁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일본은 어업문제만이라도 협의하자고 먼저 제의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1953년 10월 3차 한일회담이 개최되었지만 15일만에 결렬 되었다. 이는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의 발언 때문이었다.
구보타의 발언 내용은 ▲ 36년간 일본의 한국 점령은 한국에 유익 ▲ 한국 민족의 노예화에 대해서 언급한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이 흥분한 상태에서 쓴 것 ▲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 명령 제33호에 따라 처리한 것은 국제법 위반 ▲ 대일강화조약 체결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 ▲ 연합국이 일본 국민을 한국에서 송환한 것은 국제법 위반 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대한청구권 철회와 구보타 발언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형식적으로는 구보타의 발언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에 한국정부는 평화선 경계를 강화해 침범하는 일본 어선과 어부들을 나포 억류하는 강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1953년 당시 나포된 일본어선은 47척, 억류된 일본인 585명에 이르렀고, 1961년에는 300척이 넘는 어선과 4000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억류되어 있었다. 일본도 자국 어선의 나포와 억류에 항의하는 한편 미국을 통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무력사용 가능성을 공공연히 흘리는 등 대립을 첨예화시켰다. 1958년 4월 미국의 지속적 요구로 제4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재일한국인의 북송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4.19로 인한 이승만 정부의 붕괴로 회담은 중단됐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한일회담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이승만 정부의 한일회담의 결렬은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감정적 대결 때문으로 보이지만, 양국 모두 내부적으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경우 이 시기는 한참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회담이 타결되면 한국 측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함으로 일본입장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한국의 강제점령통치에 대해 먼저 사과하라는 한국의 요구도 일본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국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로 국가안보가 보장되고, 미국으로부터 연 2~3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의 해결 없이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충북대신문학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