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 대한 오해
이슬람은 불교, 기독교와 함께 세계 3대종교로서 세계 140여 개국에서 약 13억 명이 믿고 있는 종교이다. 그럼에도 ‘이슬람’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테러, 폭력, 여성차별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TV 뉴스를 장식하는 테러, 내전, 폭력 장면의 대부분은 이슬람이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의 악당은 대부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차지했다.
이슬람에 씌워진 부정적이고 호전적인 이미지는 비 이슬람권, 특히 서구 언론의 왜곡된 보도와 이를 그대로 옮겨 보도하는 우리 언론의 영향이 크다. 특별한 관심 없이는 쉽게 알기 어려운 이슬람을 종교로서가 아니라 상식으로서 조금만 접근해 보자.
이슬람과 무슬림
‘이슬람’은 아랍어로 순종을 의미한다. 즉 ‘이슬람’은 교조인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 마호메트의 아랍어 이름, 570~632)의 말씀과 유일신(알라 Allah)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또한 ‘이슬람’은 평화를 뜻하는 아랍어 ‘살람(salaam)’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반면 ‘무슬림’은 ‘순종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이슬람’을 믿는 신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무슬림(여자는 무슬리마라고 함)’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크리스찬’이나 불교를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불자’와 같은 용도로 쓰이는 말이다.
무슬림은 ▲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라는 신앙고백(shahadah) ▲ 일출, 정오, 오후, 일몰, 심야의 하루 다섯 번의 예배(salat) ▲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게시를 받은 달인 이슬람력 제9월인 라마단의 금식(sawm: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 흡연, 성관계를 금하고 밤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단 여행자, 병자, 임산부 등은 금식의무를 면해주지만 이후에 별도로 금식을 해야 한다) ▲ 자선을 의미하는 희사(喜捨 zakat), ▲ 능력이 된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hajj) 를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
쿠란과 성경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은 아랍어로 ‘읽기’라는 뜻으로 인간이 가감 없이 받아쓴 신의 말씀이다. 그런데 쿠란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쿠란에는 유대-그리스도교적 요소에 아랍적 요소가 추가되어 있다. 쿠란에도 아담, 아브라함, 노아, 모세, 그리고 예수를 포함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등장한다. 이들은 무함마드보다 앞선 유일신의 예언자로 등장하는데, 특히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무함마드는 유일신이 보낸 최후의 예언자로 신의 마지막 계시를 받은 사자이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쿠란에서도 하나님은 그릇된 신을 섬기는 무리에게 경고하기 위해 예언자를 보낸다. ‘신’은 아랍어로 ‘알라’이며 이는 유일신으로서 유대교의 ‘하나님’,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아랍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쿠란은 성경과 달리 인간의 원죄를 주장하지 않는다. 쿠란에 의하면 아담은 성경과 같이 금지된 선악과를 먹어 징벌을 받지만, 그는 곧 회개하고 신의 예언자가 된다. 아담은 무함마드로 끝나는 이슬람의 예언자 계보에서 첫 번째 예언자가 된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는 원죄 개념이 없다. 원죄가 없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 죽음으로써 원죄를 씻어 줄 구세주도 필요 없다. 쿠란상의 예수는 처녀에게서 잉태한 알라의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신적 존재는 아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도 다른 종교처럼 여러 종파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수니파와 시아파다. 이슬람이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리게 된 계기는 교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슬람은 교조인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원로들의 합의에 의해 예언자의 오랜 친구이며 장인이기도 한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가 할리파에 올라 무함마드를 계승했다. ‘할리파’는 아랍어로 ‘뒤따르는 자’라는 뜻으로 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종교 권위자를 칭하였다. 그러던 것이 10세기에 이르러 압바스 왕조의 할리파가 정치적 실권을 잃고 당시 실권자에게 ‘술탄’ 칭호를 내리면서 할리파는 상징적인 종교 지도자로만 남게 되었다.
아부 바크로 이후 제2대 할리파에 오른 우마르(재위 634~644)는 정복에 몰두하여 실질적으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제3대 할리파 우스만(재위 644~656)대에 나타났다. 이슬람 신앙의 기치 아래 단결된 힘으로 대정복을 이룬 아랍족이었지만 할리파 계승 문제를 놓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고, 중앙정부와 정복지인 지방정부 사이에도 알력이 싹트고 있었다.
우스만은 본래 부유한 상인으로 우마이야 씨족 출신이었다. 우마이야 씨족은 원래 무함마드의 이슬람에 적대적이었는데 메카 함락 이후에 마지못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스만은 씨족의 의사와는 반대로 일찍부터 무함마드를 추종하여 신임을 받았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제2대 할리파 우마르가 죽자 우마이야 씨족은 우스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할리파로 등극시킨다. 할리파가 된 우스만은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친족들을 지방 총독으로 파견하여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우스만은 자신이 파견한 총독의 권력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정복지 원주민들의 불만을 사게 됐고, 결국 우스만은 살해된다.
뒤를 이어 4대 할리파로 알리(재위 656~661)가 추대 되었다. 알리는 어린 시절의 무함마드를 보살폈던 무함마드의 숙부 아부 탈리브의 아들로서 무함마드와는 사촌이면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했기 때문에 사위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주장도 있다. 알리는 무함마드 사후 할리파로 아부 바크르가 선출된 후 종교적인 임무에만 열중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할리파에 선임된 알리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우스만을 살해한 자들의 재판 회부를 외치며 반란이 일어났다. 그 주동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가장 총애했던 3번째 부인 아이샤였다. 아이샤는 1대 할리파 아부 바크로의 딸이기도 하다.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고 하여 ‘낙타전투’라고 불리는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번에는 우마이야 씨족 출신으로 우스만의 친척인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우스만의 복수를 외치며 반기를 들었다.
양 세력은 657년 시핀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언덕에서 충돌하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양측은 협상에 들어가지만 실패하고, 결국 이슬람 공동체는 동쪽은 알리, 서쪽은 무아위야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그후 알리는 암살을 당하게 되고 제국은 무아위야에게 넘어간다. 결국 무아위야(재위 661~680)는 5대 할리파에 오르지만 세습왕조인 우마이야조(Umawiyah朝, 661~750)를 열어 정통 할리파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의 후손들이 할리파 위를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시아파 이슬람의 시작이다. 시아 이슬람은 비아랍계 무슬림들인 마왈리(종속민)들의 사회적 불만과 결합하면서 국가와 기존질서에 반대하는 종파로 성장했다. 이와는 반대로 우마이야 왕조를 인정하고 국가와 기존 질서에 영합한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의 주류인 수니(Sunni:관행주의자)파가 되었다. 즉, 시아는 이슬람 세계에서 진보로, 그리고 수니는 보수로 자리 잡았다.
이슬람과 여성
무슬림 사회의 여성들은 억압과 폭력, 차별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01년이 돼서야 남편과 함께 오지 않은 여성도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쿠웨이트는 2005년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인정했고, 2009년에야 남편의 서명 없이도 기혼 여성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또한 이슬람 여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히잡, 차도르, 니캅, 부르카 등의 베일은 비 무슬림들에게는 여성에 대한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슬람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일 착용을 강요한다. 쿠란에는 여성의 베일 착용에 대해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는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이르라. 그때는 외출할 때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한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간음되지 않도록 함이라(쿠란 33: 59),”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나타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그리고 가슴까지 가리는 머리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 그녀의 아들, 남편의 아들, 그녀 자매의 아들, 여성 무슬림,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한 하인,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쿠란 24:31)”고 기술하고 있다.
무슬림 여성의 베일착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제어하기 위하여 피해자인 여성에게 베일착용의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의 베일착용은 급속하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여성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교육과 참여의 기회를 축소시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베일착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베일이 여성의 몸을 가려줬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한 단순한 대상물로 전락하지 않았고, 온전한 한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는 사회적 기회가 제공됐다고 주장한다. 또한 베일을 착용함으로써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남성에게만 허용되었던 사회진출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성의 베일 착용은 무함마드가 이슬람 선교를 시작했던 6세기 당시 아랍사회에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이슬람의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쿠란이 특정 시점, 특정 사회 맥락 속에서 계시되었으므로 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알라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에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쿠란의 내용을 무슬림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보고, 쿠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무슬림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이는 종교를 국가로부터 분리한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이념이 실현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슬람주의’ 간의 논쟁이기도 하다.
현재 무슬림 여성의 베일 쓰기는 지역에 따라 그 적용과 의미가 천차만별이어서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동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