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제민(經世濟民) = 경제(經濟)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은 우리가 흔히 쓰는 ‘경제(經濟)’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그 어원으로 생각해보면 경제는 정치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 된다. 거창한 의미를 떠나 ‘경제(economy)’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서비스)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모든 활동’으로 나온다. 이 정의대로라면 우리의 생활 모두가 경제에 속한다. 아침밥을 먹는 것은 누군가가 생산한 쌀을 소비하는 것이고,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강사가 생산하는 강의라는 서비스를 학생들이 소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 자체인 경제는 언제나 힘들다. 호황기도 있기는 하지만 경제는 늘 살려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늘 논란이 있어 왔다. 그 논란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시장과 정부 중 누가 경제를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논란의 시작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여기서는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부터 출발해 자본주의 경제정책과 이론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 논란의 요지를 알아보자.
고전적 자유주의(자유방임의 시대)
아담 스미스가 살던 당시 유럽은 절대군주가 부국강병책으로 중상주의를 표방하며 경제를 강력히 통제하고 있었다. 귀족 및 대자본가들과 결탁된 절대군주의 통제는 중소 상공인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아담스미스는 그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자유방임주의로 표현되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다. 때문에 국가의 개입 없는 자유로운 시장이 보장될 때 개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시장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 그들의 경쟁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가격조절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이것이 국가 전체의 부와 번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정부의 역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부에게는 개인이나 집단의 부당한 탐욕을 단속하는 공정한 법질서의 확립, 다리나 부두와 같은 공공시설의 건설과 관리, 서민 자녀들을 위한 초등교육, 예금자 보호를 위한 금융기관 감독 등과 같은 최소한의 역할을 주문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방임 경제정책은 19세기 서양에서도 완전히 실현된 곳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세기 중반의 영국 정도에서 어느정도 현실화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는 19세기 서양에서 원칙적으로 옳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산업혁명과 함께 부의 집중으로 인한 시장의 실패 현상이 나타나면서 공격을 받게 된다.
케인스와 복지국가
시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유방임주의는 빈부격차, 불황과 실업, 독과점, 공해, 공공재의 부족과 같은 시장의 실패로 인해 점차 그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29년 미국 뉴욕의 금융시장 붕괴로 촉발된 대공황으로 인해 시장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이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대공황이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때 대공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며 주목받은 사람이 바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다. 그는 건설적인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시장과 국가를 결합시켰다. 즉 시장의 실패를 국가의 개입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자신의 저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대공황의 원인을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의 부족으로 진단했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보았는데 바로 이 공급을 창출하는 수요가 유효수요다. 따라서 정부는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댐이나 도로 건설을 위해 실업자들을 고용한다. 고용된 실업자들은 정부로 부터 임금을 받게 되고, 그들은 소득이 생겼으므로 소비를 하게 된다. 소비의 증가는 기업가의 소득이 되므로 기업가는 새로운 투자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새로운 고용을 일으킨다. 이는 다시 새로운 소비와 투자로 이어져 경제는 살아나게 된다. 이러한 케인스의 주장은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으로 현실화 되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시기적으로 뉴딜정책이 케인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케인스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같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케인스를 지지하는 경제학자와 관료들인 케인지언들(Keynesians)에 의해 정부의 경제개입으로 실업과 빈곤을 해결하려는 ‘복지국가’를 지향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완전고용과 총수요 확대 및 소득의 재분배를 이루어 내고, 그 결과 경제안정과 성장을 이루는 방식을 케인스주의(Keynesianism)라고 부른다.
케인스주의는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인 포디즘(Fordism)과 결합하여 제2차 세계대전후 20여년간 경제호황을 주도하며 한 세대를 풍미하지만 곧 위기가 닥친다.
새로운 위기, 스태그플레이션
1970년대는 세계경제사에 있어 대전환의 시기였다. 먼저 공급과잉에 의한 경제불황이 도래한다.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케인지언들은 포디즘과 테일러리즘(Taylorism: 노동의 표준화를 통한 생산 효율성 증대)에 의한 과잉생산 문제를 개인과 기업의 소비증진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곧 소비는 한계를 보였고, 공급과잉은 경제불황을 촉발시켰다.
또한 국제거래에서 기축통화로 사용되던 달러화의 통화량 증가로 1971년 미국은 달러화에 대한 금태환 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체제를 지탱해오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달러가치의 하락과 함께 세계금융체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1944년 세계 주요 44개국이 달러화를 세계경제의 기축통화로 정하는 데 합의하여 출범한 국제통화체제를 말한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5%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막대한 금보유량을 바탕으로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금과 고정시켰다. 즉 35달러당 금 1온스(약 7.56돈)의 교환(금태환)을 보장했고, 각국 통화는 달러와 고정환율로 묶었다. 때문에 당시 달러는 금과 동일한 가치를 가졌다. 그러나 냉전체제하에서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팽창을 막아야 했던 미국은 우방들에게 막대한 경제와․군사 원조를 해야 했다. 마샬플랜과 베트남전이 대표적 사례다. 이로 인해 많은 달러화가 미국 밖으로 빠져나가게 됐고, 1971년이 되자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보관이나 유통되고 있는 달러화가 미국 금 재고량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화에 대한 금태환 금지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달러화의 가치하락과 함께 중동의 산유국들이 주도하는 OPEC(석유수출기구)가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원유를 정치무기화했다. 때문에 원유가격이 폭등하는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석유값이 오르니 물건 만드는 원가가 오르고, 생산원가 오르니 물건값도 올라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과거 인플레이션은 호황기에만 발생했는데 이 시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불황기임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경기침체(stagnation)기의 물가상승(inflation)을 설명하기 위해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위기 앞에 케인지언들의 처방은 한계에 부딪혔다. 주로 재정정책을 통해 호황기에는 통화량을 줄이고, 침체기에는 통화량을 늘리는 그들의 처방은 스태그플레이션하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통화량을 줄이면 물가인상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르나 경기가 더욱 침체되고, 반대로 늘리면 경기는 살아날지 모르지만 물가가 더욱 인상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처방으로 신자유주의가 부상한다. 신자유주의의 주장은 케인스주의가 주류이던 시절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새로운 위기의 출현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 시장의 귀환
신자유주의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시 시장이 주도하는 경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 von Hayek, 1899~1992)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케인지언들의 정부개입 경제정책을 꾸준히 비판해 왔다. 신자유주의자들 간에도 이론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신자유주의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에 대한 불신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아담 스미스는 당시의 정부를 왕과 대자본가가 정경유착으로 서로 결탁해 일반국민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존재로 보았다.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정부를 정치인과 관료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나 특정집단의 로비에 놀아나는 불공정한 조직으로 본다. 즉 정부도 개인처럼 사적인 동기로 움직이는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둘째,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시장의 실패(빈부격차, 불황, 독과점, 환경파괴, 공공재의 부족 등)를 완화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은 인정하지만, 시장에 영향을 주려는 정책과 규제는 완화 또는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세금 감축, 통화남발과 적자재정 금지, 정부기구 축소, 공기업 민영화, 경제규제 축소, 자유무역, 노동자 보호 축소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이 이에 속한다. 신자유주의가 제시한 작은 정부 정책들은 기업의 생산비용을 줄여 비용인플레이션(생산비용 상승으로 생긴 물가인상)을 해결하고,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높여 스태그플레이션을 탈출하려는 처방들이다.
셋째, 복지제도의 축소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제도가 정부의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근로의욕을 감소시켜 ‘복지병’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온다고 보고 복지제도의 축소를 주장한다. 다만 최소한의 공공복지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기 때문에 공공복지제도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영국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2013)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규제철폐,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공공복지 축소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원인이 되어 현재 빈부 양극화가 심화되고, 투기 자본에 의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시장과 정부의 공존(?)
이제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시장과 정부 모두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장주도와 정부개입의 정책들이 번갈아 되풀이 되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으로 부작용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시장의 자유’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부의 개입’이 적절히 공존하는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신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