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에 대한 관심
나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감동을 주었던 책들 중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매스컴을 통해서 이름만 알았던 달라이 라마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가 살아온 배경과 티벳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티벳과 중국의 갈등에 대해 알게 되고 마음 아파하던 도중 티베트와 당나라에 관련된 문성공주에 대한 논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성공주(文成公主)에 대해서는 강의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어 더욱 더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강의시간에 배운 당나라의 사회.경제를 논문에 적용시켜 읽으니 더욱 더 흥미롭고 사실적이었다. 또한 논문을 읽다보니 지금 조명 받고 있는 중국과 티벳의 갈등을 이해 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알게되고 느낀 것들을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적는다.
중국의 혼인정책
광활한 대륙 위에서 많은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중국은 끊임없는 영토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상 중앙왕조의 통치자들은 정치적으로 변경지역 소수민족의 상층부와 연맹을 공고히 하여, 변경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거나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혼인정책을 썼다.
널리 알려진 혼인정책으로는 한나라 원제 때 흉노족 선우에게 시집을 갔던 왕소군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당나라 태종 때 토번(지금의 티벳)의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간 문성공주다.
문성공주가 머나먼 토번으로 시집감으로써 당 왕조와 토번의 변경지대는 몇 십 년간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한족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큰 발전을 일궈냈다.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
7세기 초 토번족의 제32대 국왕 송찬간포는 청장고원일대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강대한 토번왕국을 건설했다. 송찬간포는 왕권 확립에 힘을 다하여, 국왕이 중심이 된 고도의 중앙 집권적인 완벽한 정치․군사기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법률과 세제를 제정하고, 현명한 대신을 기용하여 백성들이 선진 생산기술을 배워서 토번의 사회경제와 인민생활이 신속히 고속성장의 궤도에 오르도록 했다. 또한 당시 대당 왕조의 국력이 강성한 것을 보고, 당나라와 우호관계를 진일보 발전시키고자 했다.
당 정관 8년(서기 634년), 당 왕조와 토번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시 사자들이 서로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한번은 송찬간포가 당나라 사자와 이야기하던 중 돌궐과 토욕혼이 모두 당의 공주와 혼인하여 화친을 맺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외에도 사적으로 당나라 여자들이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당나라와도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싶었던 그는 자신도 당의 공주와 혼인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송찬간포의 이러한 소망은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러 차례의 구혼 끝에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구혼으로 그는 대량의 금은보석과 함께 사자를 장안으로 보내어 당 태종에게 구혼하였다. 처음에 당 태종은 토번에게 매우 잘 대해 주고, 토번에 공주를 시집보내겠노라고 속 시원하게 승낙하고 많은 선물을 그 사자에게 하사했다. 그러나 이때 방해꾼이 등장했다. 토욕혼의 사자도 구혼을 위해 당에 왔는데 그는 당태종에게 송찬간포가 야만적인 사람이라고 고변하였고, 태종은 예물이 너무 적다는 핑계로 송찬간포와의 혼사를 취소해버렸다.
이를 들은 송찬간포는 원래부터 마찰이 많았던 토욕혼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송찬간포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토욕혼을 공격했다. 이에 토욕혼의 왕은 막강한 토번의 세력을 보고 환해 일대로 퇴각하였다. 이 기세를 몰라 송찬간포는 자신의 체면을 구긴 당을 압박해 혼인을 성사시키기고자 당나라 변경 송주를 침략했다.
이에 매우 분노한 당 태종은 즉시 토번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당나라의 군대를 얕잡아 본 송찬간포는 당나라 군대에 크게 패했고, 신하의 예를 갖추어 사죄를 청하면서 황금 5000량과 진귀한 보물들을 바치고 다시 혼인을 요청했다. 이에 당태종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마침내 아름답고 총명한 문성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당 고조 이연에게는 19명의 딸이 있었고 당 태종 이세민에게도 21명의 딸이 있었는데 어려서 요절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당조의 신하들에게 시집갔다. 문성공주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그녀가 당종실의 딸이라는 것뿐이니 성은 의당 이 씨일 것이나 황실의 먼 종친일 것이며, 화친이라는 일의 중대성으로 인해 그녀를 파격적으로 공주에 봉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당시에 토번족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각종 가구며 그릇, 패물, 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 문학책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서적 및 의약품, 종자까지 마련해주었다. 또한 사절단으로써 시녀들 이외에도 일군의 목사, 악사와 농업기술자까지 있었으니 가히 ‘문화방문단’이라 해도 될 만큼 손색없었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등불상도 함께 가져갔다. 그리하여 641년 대규모로 구성된 호송대의 호위 아래 문성공주는 토번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
문성공주 티벳에 문명을 주다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것은 티벳의 역사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왕조 이전에 토번은 중원과의 왕래가 없었다. 토번인은 동진 말년에 선비족 사람인 남량국왕 독발리록고(투파리루구)의 후예로, 나라를 잃고 전전하다가 티벳 고원까지 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유목 위주의 생활을 하며 야크와 고라니, 낙타를 기르고 쌀보리와 메밀을 심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하는 민족이었으니 문화수준은 당나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문성공주와 당의 문화사절단은 이러한 티벳에 문명의 역사를 선물했다.
토번족은 정착된 주거생활을 하지 않은 유목민족이므로 이동에 편리한 천막이 집이었다. 따라서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선공주와 함께 들어온 건축에 관한 책들과 솜씨 좋은 장인들을 통해 건축기술을 익히고 크고 높은 새 궁전까지 완성시킬 수 있었다. 또한 토번에는 해마다 큰비가 내려 밭이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데려온 농사기술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했다. 그들은 밭 사이와 가장자리를 자세하게 관찰한 뒤, 토번 사람들의 잘못된 경작습관을 알아냈다. 그 후에 그들은 올바른 경작습관을 가르쳐 주고 당에서 가져온 곡식 종자를 파종하자 굵고 튼실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문성공주는 야크의 가죽과 털로 만든 옷만을 주로 입은 토번족에게 뽕나무를 심는 법부터 누에를 쳐서 실을 뽑고 짜는 기술을 전수해 토번 스스로 방직품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또한 당나라에서 파견된 악사들도 직분을 수행했다. 송찬간포는 당나라의 음악에 감탄해 자질이 있는 어린아이를 뽑아 악사들에게 배우도록 하여 당나라의 음악을 토번에 널리 알리게 했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또한 송찬간포는 정치적으로 불교의 교의가 토번족 토속 신앙인 분교보다 통치에 훨씬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왕권신수 사상을 빌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불법을 제창하고 신봉한 문성공주의 주장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400여 개에 이르는 사원 신축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티벳에서 불교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티벳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사원인 대소사는 바로 문성공주의 배려로 건축된 것이다.
이처럼 문성공주와 문화사절단은 토번에 선진문물을 전파해 줬고 백성들은 그녀를 신처럼 받들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혼사를 치룬 지 9년이 되는 해에 송찬간포는 불행히도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제도에 따라 문성공주는 장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미 토번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떠나지 않고 영륭 원년(680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40년간 티벳을 위해 살았다.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토번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곳곳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기렸다. 또한 문성공주를 따라갔던 문사와 공장들도 계속 후한 예우를 받았다.
문성공주는 토번에서 근 40년을 살면서 토번의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는 티베트의 대신들이 티벳 문자를 만들도록 격려했으며 한족의 서적을 번역하여 당과 토번의 문화교류를 촉진했다. 선진문명을 흡수한 토번은 급속도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융합을 촉진하고 국가의 통일을 공고하게 했다. 그래서 문성공주는 지금까지도 티벳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로 남아있다. 티벳 백성들에게 그녀는 천상 신녀의 화신이며 우호의 화신인 것이다.
한편 토번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혼인정책으로 문성공주를 토번에 보낸 당나라는 오랫동안 서남쪽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닮은 티벳
처음에는 흥미로워 선택한 이 논문을 통해 나는 다양하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평소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티벳을 재조명하고 티벳의 아픔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논문은 중국과 티벳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은 두 나라가 갈등을 겪고 있지만 처음 두 나라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무력을 통한 진압과 억압이 아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진심어린 마음이 전해져 두 나라에게 모두 이득을 가져다준 문성공주와 송찬간포의 혼인을 통해 우리는 두 나라의 관계가 소통의 관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소통의 관계였던 두 나라가 지금은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싸우고 아파하고 있다. 나는 이런 모습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조금만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주면 두 나라 모두가 평화롭게 잘 지낼 수 있는데 약간의 이득을 위해 상처를 주는 모습이 슬펐다.
나는 이런 티벳의 모습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더욱 더 공감할 수 있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정부를 세우며 독립을 주장하던 우리나라의 모습이 티벳과 겹쳐보였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시켰던 일본과 티벳의 문화를 무시하고 중국의 문화로 편입시키는 중국의 모습이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중국이 갖고 있는 고유의 문화와 전통은 훌륭하다. 동양사에서 중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반을 넘는 만큼 그들이 오랜 세월을 걸쳐 쌓아온 오래된 역사와 문화의 힘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를 대함에 있어 그들의 태도는 인정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지워가며 역사를 왜곡시키고 더 나아가 유혈사태까지 일으키는 그들의 불편한 정의는 용납할수 없다. 그것은 정당한 행위가 아니다.
티벳의 아픔은 티벳만의 아픔이 아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이어 동북공정이란 단어가 이제는 익숙할 만큼 우리의 역사는 이곳저곳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음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전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세계화됐고 각 나라와 각 민족의 다양성은 인류가 발전해온 이래로 가장 존중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에 맞게 각 나라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치고 무례를 저질렀으면 사과하는 태도를 갖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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