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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국외적 원인과 한반도 정세
제 870 호    발행일 : 2013.11.18 
2013 현상공모 <으뜸 레포트상 최우수상>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5년, 남한과 북한에 각각 개별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이 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조선인민군은 38선을 넘어 남침을 강행한다. 이틀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인민군에 밀려 남한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가고 국군은 최우의 방어선인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곧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UN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전세는 역전됐고, 서울 수복.평양 함락에 이어 국군과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역전극이 이뤄진다. 이번엔 북한을 포기할 수 없던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고 중국군의 인해(人海)전술에 밀려 국군과 UN군은 남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이후 38선 일대에서 양측 모두 진퇴를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로 한국전쟁은 ‘정전’이 아닌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국방부 전사 편찬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전사한 국군과 UN군 수은 48만 명, 인민군과 중국군 수는 150만 명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400만 명이며,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천만 명이 양산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휴전 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기형적 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는 긴장과 대립 속에 정신적, 물질적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의 국외적 원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연합국 승리의 주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대결로 세계는 냉전시대로 진입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 확산을 목표로 동유럽으로의 팽창주의 정책을 폈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서유럽을 지원하는 마셜플랜(Marshall Plan)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구체화된 트루먼 독트린으로 맞서면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영국의 처칠(W. Churchill) 수상은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 거대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쳐져 있다는 연설을 통해 당시의 냉전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냉전 상태에서 벌어진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첫 번째 무력충돌이었다.
  한국전쟁의 국외적 원인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필자는 스탈린의 의지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스탈린 주도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팽창이 나토의 등장으로 어렵게 되자 극동으로 눈을 돌려 미일 평화조약을 견제하고,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면서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시위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북한군 군수품의 대부분을 소련이 제공했다는 점과 스탈린이 김일성의 개인적인 정치적 후원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타당성을 갖고 있다.
  김일성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된 인물이다. 북한에서는 정설로 여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동일인물인지 논란이 있는 보천보 전투(1937년 항일유격대가 함경도에서 일본부대를 습격하여 승리하고 그 지역을 점령한 전투)의 영웅 김일성은 조선인들의 민심을 잡고 스탈린이 유용하게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매우 유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 주도설은 역사적 사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아직 확립된 정론은 아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염려해 한반도에서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충돌을 반대했고, 김일성은 48번이나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을 요구해 김일성의 의지를 꺾기가 힘들었던 스탈린이 마지못해 남침을 승인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 싶다. 과연 국제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한국전쟁을 김일성이 설득한다고 스탈린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인가? 또한 그렇게 전쟁을 반대했다면 왜 북한군에게 군수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했는가? 때문에 필자는 한국전쟁의 발발에는 김일성의 의지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자발적 의지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정세

  1945년 해방 이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우리의 독립 여망은 보류되었다. 1948년 남과 북에 공식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38은 형식적인 존재로 민간인의 이동이 가능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어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과 북의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38선을 베고 죽겠다”는 김구의 남북 단일정부 수립 노력이 좌절되고, 이승만의 반공노선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노선의 대립각은 점차 첨예하게 되어 38선 통행이 금지되고, 국지적인 무력충돌도 빈번했다.
  당시 이승만은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요청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북한을 자극하여 발생한, 사실상의 북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남침을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여 매우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다.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모스크바에서 북한과 중국의 고위 군부 대표가 참석하는 군수뇌 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북한군 증가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귀국시켜 5개 사단으로 편제하고, 8개의 전방사단과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창설하기로 되어 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고, 3월 17일에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한다. 이는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과 달라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스탈린의 전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북한은 한국전쟁 전에 남한의 정보를 세밀히 수집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북한군 정보문건은 1950년도 남한의 쌀, 보리 등 농작물 예상 수확량을 군(郡) 단위까지 세밀히 기록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남한을 점령했을 때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해 놓고 있었다. 북한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없이 도로 폭을 2배 이상 넓히는 일에 동원됐고, 당시 남한에 전무했던 ‘T-34/85’ 전차를 확보해 놓기까지 했다.
  반면 남한의 국군은 미국철수 후 일본군이 버리고 간 장비와 시설, 그리고 미군이 이양하고 간 약간의 노후한 경장비로 무장하는 데 그쳤다. 미국은 한국군의 북진을 우려했기 때문에 군사원조도 매우 소극적이어서 기존 장비의 유지관리를 위한 정비와 수리부속 제공에 그쳤다. 또한 당시 남한정국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친일파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반민특위가 와해되어 국민 분열의 씨앗이 심어졌고, 일찍부터 부패한 정권의 실정으로 국민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뒤로 하고 이틀 만에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서울을 버렸다. 이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5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대부분의 서울시민은 고립되어 북한군 치하에 떨어진다.


나가며

  이처럼 냉전 시대라는 국제상황, 남북 단일정부수립 좌절, 뒤따른 남북 간의 대립 국면이 어우러져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한국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냉전이 시작된 시기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태평양의 해양세력과 소련과 중국이라는 대륙세력의 충돌이 남한과 북한을 대리로 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으로 일으켰고, 우리 민족의 희생을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어찌되었던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의 책임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그릇된 “군사적 모험심(military adventure)”이 엄청난 희생자와 물질적 피해를 낳았고, 오늘날 한반도의 기형적인 분단을 초래했다.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60년이 지났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중이고, 남북으로 갈린 이산가족 1세대들은 고령화되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아픔은 차지하더라도 두 동강난 비정상적인 상태로 우리민족이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분단된 채 남과 북이 대치하는 현 상태는 수많은 기회비용을 만들어낸다. 우리만 해도 엄청난 국방비가 소모되고, 젊은이들은 짧지 않은 시간을 군 복무를 위해 보내야 한다. 또한 한반도의 불안정은 투자처로서 남한의 가치를 하락시키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도 크다.
  북한은 더 심하다. ‘선군정치’의 미명 아래 인민들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 동안 수 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남자의 평균 신장은 160㎝도 안 되며, 심지어는 140㎝대도 많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북한 인민들의 신체조건 변화를 일부 학자들은 ‘인종 변화’라고 부르며 우리민족의 동질성 훼손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북한의 독재정권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3대 세습이라는 전무후무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공부하면서 전쟁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이라고 안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또한 전쟁을 조장하는 대내외적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외교도 중요하다. 막연히 감성적으로 통일과 평화를 외치기보다는 현실적인 대비와 대응이 중요하며 이에 대한 전 국민의 일치된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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