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새롭게 생겨나 유행하는 말이 있어 시대를 반영하곤 한다. 지금도 수많은 말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 중 최근 대학가에 회자되는 신조어는 단연 스펙인 것 같다. 학생들은 좋은 스펙을 따기 위해 성적을 관리하고 좋은 스펙을 따기 위해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자격증을 딴다. 그런데 내 기억에 2000년 이전에는 스펙이라는 말이 쓰인 적이 없다. 스펙은 몇 년 전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쓰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너무나 자명한 의미를 갖고 대학가에 활보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스펙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내가 스펙이라는 단어에 주목한 것은 좀 엉뚱한 일 때문이었다. 컴퓨터가 말썽이 생겨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그쪽에서 스펙이 무엇이냐고 물어온 것이다. 나는 컴퓨터에도 스펙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이 의아했고, 결국 사전을 뒤져 스펙의 원래 뜻을 찾아보게 되었다. 스펙은 specification의 줄임말이었고, 그 뜻은 ‘무역거래에서 상품의 재료, 구조, 성능 등을 자세히 설명한 명세서’ 였다. 아뿔싸! 스펙이야말로 이 시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었다.
학기 초에 대학가에는 작은 풍파가 있었다. 김예슬 학생의 자퇴선언이 그것이다. 그녀는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을 비판하면서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자퇴하노라고 대자보에 썼다. 그녀의 자퇴선언문을 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나는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고민을 이해하고 그녀의 용기도 칭찬하고 싶다. 하지만 또한 나는 대학을 나간 그녀가 그녀의 바람대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상품의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되었다면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대학‘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자본이 인류역사에 등장한 이후 자본은 지구 곳곳으로 번져나갔고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켜 진리 추구를 목표로 한다는 대학의 학생들이 좋은 스펙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스펙이라는 말의 유행은 인간이 스스로 상품이 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우리 시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스펙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들의 무감각이다. 아무도 그 말에 담겨 있는, 인간을 상품화하는 시대의 의미를 의식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청년실업이라는 절박한 현실을 빌미 삼아 스펙이라는 말을 무기로 들고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자본의 논리에 굴복시키고 있다. 스펙을 추구하는 소리가 커지는 것에 비례하여 대학에서는 ‘사람’을 말하는 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상품으로 전락하고 나면 사람은 어디에서 숨을 쉴 것인가? 대학마저, 그리고 청춘마저 사람임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대학은, 청춘은 자신이 사람임을 느끼고 가슴에 요동치는 갈망과 불안, 환희를 공유하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