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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국문수기 부문 당선작 - 아버지의 윷놀이
제 869 호    발행일 : 2013.11.05 
이재현(독어독문학과·11)
  작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결혼을 한 누나들과 매형들이 집에 왔다. 누나들의 결혼으로 사위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겨서 화기애애한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는지 아버지가 윷놀이를 제안하셨다. 이내 윷판이 깔리고 편을 나눴다. 아버지와 어머니, 큰딸 부부 그리고 작은딸 부부. 나는 “너도 윷판에 끼고 싶으면 내년에는 여자 한 명 데려와라” 라는 무게감 있는 농담을 들으며 말이나 놓는 신세가 됐다. 윷판에는 얼마간의 돈이 걸리고, 새해의 출발처럼 윷말들도 출발하기 시작했다.
  먼저 하면 손해인 것은 세상에 윷놀이 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가는 말은 초반에 분명 다른 말에게 잡히니까 말이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출발선상에서 잡고 잡히던 윷말들은 어느새 지름길로, 또는 윷놀이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기 힘들어 보이는 머나먼 길로 흩어지고 있었다. 내 다리 밑에는 3명의 신사임당 할머니가 보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말들이 하나 둘 결승점에 들어왔는데 첫째 딸의 마지막 말이 결승점 바로 앞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게 잡힐 위기에 놓였다. 아버지의 윷말 뒤로는 둘째 딸의 ‘업힌’ 윷말이 헐떡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개’만 던지면 첫째 딸 말을 잡을 수 있었고, 어쨌건 ‘도’만 나오지 않는다면 1등으로 2명의 신사임당을 차지하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팔이 유난히 가벼웠는지 아버지의 윷은 천장에 닿을 듯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 멋지게 ‘낙’이 됐다. 아버지는 “아니 이게 왜 이래”라며 크게 웃었고 아버지의 치명적인 ‘실수’ 덕분에 첫째 딸 부부는 1등의 기쁨을 맛봤다. 이어진 아버지의 다음 윷놀이도 낙이 됐고, 2등은 둘째 딸 부부의 몫이 됐다.
  새해가 되어 서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3분의 1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성실하고 조용하며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고, 학교성적까지 좋았던 누나들에 비해 난 사고뭉치였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사춘기, 그리고 20대가 넘어서도 마음속에 넘쳐 오르는 어떤 ‘뜨거운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안돼” 라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런 날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는 이유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말리는 아버지가 나의 판단력, 더 나아가선 내가 보고 배운 것을 몽땅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가 “네가 세상을 얼마나 안다고 이 녀석아”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막내아들인데, 다른 막내들처럼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그런 혜택을 나도 조금이나마 누리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져주는 아버지’를 원했던 것이다.
  19살 고3, 남은 인생 전부가 그때 결정될 것만 같던 그 시절, 나는 미국에 가고 싶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가 있었는데, 그곳에 와서 자기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미국 대학에 입학하라는 꽃향기 나는 제안을 내게 했다. 그때부터 미국은 나에게 선망의 땅이 되었고, 나는 유행이 지난지도 모르고 골드러쉬를 하는 개척자처럼 희망에 부풀어 노래도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샌프란시스코’만 듣고 다녔었다. 가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병에 걸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는 직시하기 싫었지만 형편없는 학교성적으로는 도무지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딘가 도망갈 곳을 찾았고, 그게 미국이었을 뿐이다. 만약 친구가 지도에도 안 나오는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로 이민을 갔었다면 난 그곳도 희망으로 포장하여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방송에서 언뜻 들어본 아이비리그, 스탠퍼드 같은 대학들은 나를 구질구질한 이 현실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방학이면 멋진 ‘지프’를 타고 애리조나 사막을 가로질르며 미국을 횡단하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진 서부의 총잡이가 된 것 같았다.
  하룻밤의 결심이 아닌 고3 내내 지속된 이 미국 타령은 결국 집안에 큰 소란을 일으켰다. “왜 내가 하겠다는 것은 다 안된다는 거예요” 라는 반항의 한마디는 결국 아버지와의 술상으로 이어졌다. 첫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데 난 그렇게 첫 술 아닌 첫 술을 아버지께 배우게 됐다. 최대한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주워들은 ‘어른과 술 마시는 법’을 나도 모르게 몸으로 보이고 있는 참 불편하고 어색해 보이는 자리였다. 그때 처음으로 난 아버지가 안된다고 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였다.
  “아들아, 도망가지 마라. 세상 어디를 가도 도망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해. 그리고 나중에 네가 철이 들면 그깟 대학입시가 대수라고 도망쳤던 기억이 너를 평생 괴롭힐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너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어. 친척에게 얹혀사는 것도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인데, 아무리 친구네 집이라도 편할 것 같니? 아버지는 네가 당당하게 살길 원한다. 돈 없어도, 가진 것 없어도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는 그저 네가 남에게 의지하며 살지 않는 그런 당당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것뿐이야”
  나는 울 나이가 훌쩍 지난 19살에 울었다. 그것도 멋지게 불의 앞에서 한두 방울 뚝뚝 흘리는 그런 사내의 울음이 아니라 마른 오징어와 소주 앞에서 엉엉 울었다. 인정하기 싫었던 나의 모습,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꼬집었을 때 스스로가 초라해져서 그렇게 크게 울었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본심을 직접 말로 들었을 때 나의 못남은 유난히 더 못나 보였다.
  결국 나는 지원했던 대학에 보기 좋게 모두 떨어져 원하지 않던 재수를 하게 됐고,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하여 남들도 그러하듯 군대에 다녀 왔다. 그렇게 부모님과 떨어져 산지 벌써 5년이 되었고 스물여덟이 되어 본 아버지의 모습은 일부러 낙을 만들어 져주는 아버지였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내가 굳이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내 결정을 존중하고 믿어주셨다. 그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고의가 아닌 것처럼 낙을 던지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언제부터였는지 티나지 않게 나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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