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유행가의 노랫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외침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유한 자신만의 소유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이는 ‘너’와는 다른 ‘나’의 주체적 개성과 실존성이 깃들어 있는 표현이다. 타인에 의해 나의 존재감이 무시당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을 생각해 보라.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은 사소한 잘못임에도 그 후유증은 꽤 오래 간다. 즉 인간의 실존적 의미부여는 본능적으로 드러날 만큼 생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젊은이들의 항변은 기성세대의 간섭을 물리치려는 영역 너머에 있는, 본래적인 주체성의 문제라고 볼 만하다. 그러나 독존적 주체와 자유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의 삶은 주변세계와 끊임없는 교섭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고 형성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더라도 이는 주변과의 공통성이라는 커다란 객관세계의 지평 위에 오롯이 솟은 작은 돌출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삶은 비슷하게 전개되어야 할 것 아닌가? 문제는 일체의 사물이 같은 듯 하면서도 조금씩은 다르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길가에 서있는 은행나무들을 수없이 대하면서 서로 다른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 내지 못한다. 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같은 것만 보기 때문이고 후자는 애써 다른 면만 보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지극히 순수한 객관의 눈으로 마주하면 같은 면과 다른 면이 있는 그대로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사물인식이다. 거대한 인간사회는 같으면서도 다른 듯 한 인간들의 관계에 의해 자연스럽게 구성되고 유지된다. 사람들의 같은 부분에 상응하여 공통의 질서가 형성되고 사람들의 상이한 부분에 상응하여 위계가 짜여진다. 이는 최적의 상황을 찾아가는 생명들의 모습만큼이나 한결같이 스스로 그렇게 이루어져 간 결과이다. 그 때문에 사회는 다소 갈등과 투쟁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역할을 담당하고 그 위치에서 요구할 수 있는 만큼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기능하고 있다. 이 원칙을 어겨 과도한 권한과 요구를 행하는 것은 잠정적일 뿐 영원할 수는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은 바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취해야할 범위와 자신이 해야 할 역할 그리고 자신이 요구할 수 있는 기대의 한도를 잘 아는 자이다. 그럴 경우 자신과 사회는 균형 잡힌 ‘바름’이 이루어지고 거기서의 나의 삶은 ‘나 다운’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게 된다. 사회의 ‘정의’와 나의 ‘정의’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인생은 꼭 그 사람만큼만 풀려간다는 점을 기억하자! 붉게 물든 낙엽이 스러져가는 이 가을에 벤치에 앉아 나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는 여정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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