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장 |
섹션 |
|
    |
|
| 좌와 우, 그 우스운 잣대에 대하여 |
| 제 836 호 발행일 : 2011.09.17 |
좌(左)그리고 우(友). 왼쪽과 오른쪽 사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위치에 서있다. 따라서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매우 흥미로운 광경을 접할 수 있다. 사람마다 서있는 (혹은 서있기를 강요받는) 그 자리에 따라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크게 분노하기도 한다. 흔히 이를 ‘이념의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가깝게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사안에서도 그러했고, 희망버스에 대한 사안도 그러했다. 설왕설래의 언쟁뿐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로 주먹다짐까지 이어진 적도 허다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화염 속으로 사라진 지도 어느덧 40여 년. 그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마저 우리 곁을 떠났다. 이에 맞춰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을 살펴보고자 여러 사람을 만나봤다. 생산직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만나고, 공직자나 경영자도 만나봤다. 스펙트럼의 양 끝에 서있을 것 같지만 결국 동시에 외치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서로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같음에도 불구하고 좌우의 이념싸움으로 인해 의미 없는 스펙트럼 선상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적과 아군을 구분해 헐뜯는 일에 주력해 왔던 것이다. 이처럼 평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편 가르기를 당연시 해오고 있다. 그리고 일단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상대방을 수구파, 혹은 좌파로 매도해왔다. 나의 편견으로 인해 한 사람의 생각을 규제해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끔찍한가. 가령 그 사람은 경제 분야에서는 보수의 입장을 취하고 있고, 사회 분야에서는 진보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내 자신이 관찰한 한 단면만을 보며 스펙트럼 틀 안에 규정짓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을 것이다. 반드시 스펙트럼 안에 모든 사람들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 ‘이념’이라는 낡고 낡은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성과 개성이 왜 존중 받지 못하는지 아이러니하다. 한 사람을 정확하지도 않은 잣대로 규정하는 일 조차 불필요한 일이 아닐까. 이러한 악습(惡習)이 지속될수록 우리사회는 절뚝발이 감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금 이 자리엔, 그의 주옥같은 말만 남겨져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의 문제에 외면할 수 없는 인간적 과제를 짊어진다.’ 그리고 나는 전태일 열사를 다시 우리시대에 옮겨 본다. 인간을 외치던, 즉 우리 자신들을 외치던 그는 과연 이 시대에서도 ‘열사’가 될 수 있을까? 각종 시위와 노동운동으로 인해 그에게는 ‘빨간딱지’만 붙여 있지는 않을까? 신문의 하단에 죽음이 작게 실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곧 잊혀지는 인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의 처절한 외침은 이념의 이야기도, 계급의 이야기도 아닌 인간 생존에 대한 요구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빨간색은 뜨거우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전태일의 외침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씁쓸한 예상에 다시 그를 70년대로 되돌려 놓는다. 남소연기자
|
|
|
|
|
|
|
|
 |
|
|
|
|
최근기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