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이계병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이 세상 나기 전에 세상사 다 알고 태어나는 이 없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이 땅에 발 디디고 살면서 세상의 지식 하나도 모르고 사는 이 또한 없다. 왜냐하면 세상살이는 앎을 필수로 하기 때문이다. 본성적 숨 쉬기가 시작되고 귀천의 숨 닫기로 끝나는 한평생 동안 앎과 삶은 항상 함께하기 마련이다.
앎에 대한 지각과 인지활동의 자연장소는 집이며, 부모는 최초의 지도자이며, 안내자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관계는 사회로 확장되어 의무적 시스템에 위탁되고 마침내는 사회의 거대한 관계망 속에서 자유선택에 맡겨진다. 전자의 기간은 초·중등이며, 후자는 대학과 그 이후로 대별된다.
이와 같이 외형적으로는 동일한 시스템을 공유하는데 왜 사람들의 삶은 서로 다른가? 더구나 다른 정도가 어찌하여 천층만층인가? 분명히 생물학적 삶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사람을 아니 사람의 삶을 같으면서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생각과 앎이 아닐까?
이 둘은 항상 서로를 좇아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함께 한다. 생각에 따라 앎을 구하고 얻으며 그 앎을 따라 생각이 확장 변화하기를 거듭한다. 인구 증가에 따른 앎의 폭의 확장과 교류의 장이 고향사회의 담을 넘어 지구 전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삶의 양상 또한 아득히 팽창하고 있다.
삶에서 몸으로 느끼는 편안함과 생각으로 품는 즐거움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해지려고 지금의 신고를 참고 견디며 힘써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상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천차만별이며, 그 색깔과 폭도 모두 다른 것 같다. 무슨 연유로 그러할까? 앎은 행복의 종자일까? 많이 알면 행복도 커질까? 그러면 앎이 없거나 모자라면 불행해질까? 그렇지 않다.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없는 것처럼 털끝만큼도 아니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누구나 원하는 행복은 지속기간의 길이와 그 질적 양적 크기에서 서로 다를 뿐이다. 오랫 동안 크게 행복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에 만인이 동의할 정답이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해 보이는 한 가지 답은 있다. 앎이 깊고 크면 행복의 질과 크기도 확장된다.
그러므로 삶은 곧 앎을 좇아야 하며 후자 또한 행복을 키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행복의 질이 높으려면 앎이 가장 독창적이거나 공유시킬 양도 커야 할 것이다. 앎이 깊어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이를 홀로 지니지 않고 두루 널리 펼치기에 이르면 어찌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일어 앎을 꿰어찬 삶이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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