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근 조형예술학과 교수
젊은 대학시절부터 꿈꿔왔던 배낭여행을 용기를 내어 이번 겨울 방학을 계기로 도전해보기로 마음먹고 스페인행 비행기티켓을 예약하기로 결심했다. 배낭여행 티켓을 예약하는데 무려 사흘 동안이나 망설였고, 티켓 예약창구가 예약폭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게 아닌 내 마음의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패키지 여행을 통해서 몇 군데 해외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은 약간의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여행다운 여행을 해야 한다는 내 자신의 여행철학을 실현하고 싶어, 일주일 내내 스페인 여행 스케줄을 짜고 다듬었다. 물론 생애 처음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이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스페인 유학을 준비하느라 스페인어 공부를 했었지만 유학은 물거품이 되어 가질 못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머릿속엔 스페인어 몇 문장밖에 기억 나지 않으니, 행여 배낭여행 중 큰 어려움을 만나면 어떻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튼 마드리드행 비행기 티켓은 예약했고 불안 초조한 스페인 여행은 인천공항에서부터 나를 긴장시켰다.
인천공항에서 파리를 거쳐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는 무려 1시간 10분 지연 출발로 파리공항에서 갈아타는 시간이 40분의 여유밖에 없었다. 처음 예약할 때 티켓창구 아가씨가 혼자가는 여행이라면 갈아타는 시간이 1시간보다는 2시간 정도가 좋겠다고 말하던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행 스케쥴이 엉망이 되었다고 공항 관계자와 심하게 다투는 여행객도 있었으니 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공항 T1에 도착해서 셔틀버스로 T2로 이동 후 마드리드 행 비행기를 타야 하지만, 셔틀버스를 초조하게 기다릴 수 없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여행객 사이를 여지없이 헤쳐 뛰고 뛰어 겨우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돌아올 때 역시 바로셀로나 공항에서의 출발 지연으로 파리에서의 비행기 옮겨 타기는 불과 20분 정도였으니 결국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나버렸다. 한겨울에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으로 목욕을 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파리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비행기 역시 1시간 지연출발이라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어디 있겠는가? 파리공항에서의 힘들고 초조했던 탑승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평소 생각에 대한 정리를 해야 했다. 일 년에 스페인을 방문하는 여행객이 4000만 명(스페인 인구 3945만 명) 이상이라는 것과 국가 총생산액의 40%가 관광 수입이라는 것. 물론 조상 잘 만나 물려준 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그러하니 우리로선 부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의 대부분은 현존하는 건축물로 11세기에서 14세기 이슬람문화에 14세기 이후 로마 카톨릭 문화가 혼합된 종교적 성향의 건축물들이다. 그 규모나 장식성의 극치를 보면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과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의 끝없는 명예와 권위와 욕망은, 신께 찬양하고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모든 것을 쌓아 놓으라는 경전의 가르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아 순간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거의 1세기 이상 지속된 이러한 엄청난 종교건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었으며 그 민폐는 어떠했을까. 여기서 나는 인류 역사의 변화와 성장과정에 종교가 끼친 영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유적이나 건축물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과정과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 강력한 군주나 권력의 최상위층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산들로, 오늘날 나를 포함한 많은 여행객들은 그들이 축조해놓은 유물들에 감탄하고 황홀해하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정신으로 보면 조금은 아이러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첫 여행지 마드리드의 국립 소피아미술관에서 마주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마주하는 순간, 특히 미술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총통의 독일군 지원요청으로 이루어진 불행한 게르니카 마을의 폭격은 당시 피카소로서는 참기 어려운 비극이었고,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피카소는 화폭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후 피카소는 프랑코 총통의 눈에 가시가 되어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고, 겨우 프랑코 총통 사후 그는 게르니카를 고국에 가져올 수 있었으니, 게르니카는 작품성을 떠나 전쟁의 비참함과 군부독재의 부당성, 인간애를 동시에 보여주는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한동안 나는 게르니카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거리의 요새화된 오백년 전 스페인의 수도였던 똘레도는 타호강에 둘러싸인 중세성곽도시다. 엘 그레코의 작품에 등장하는 똘레도 성당의 모습과 오래된 가게들, 너무나 예쁜 전통 수공예품들, 둥그런 보름달과 함께 전망대에서 본 똘레도의 야경은 마드리드 행 마지막 버스마저 외면하고 싶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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