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물결처럼 끊일 새 없이 내닫던 수만 학생의 대열, 천둥과 같이 울리던 수만 학생의 울부짖음, 지축을 흔들던 울분과 찢어질듯 한 분노의 폭발을 보았고, 그 대열, 그 절규, 그 폭발은 독재와 부정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근대민주정치의 과제는 권력의 해독(害毒: 좋고 바른 것을 망침)으로부터 민주주의 기본제도를 수호해 나가는데 있다’고 한 라스웰의 명언을 빌지 않더라도 장기집권이 잉태한 극한의 독재, 부정, 부패 그리고 하늘마저 통곡했던 조국의 진통과 민족의 불운을 그대로 외면할 수 없었다. 배운 대로 읽은 대로 민주정치와 공명선거를 외쳤고 애오라지(오로지) 민주수호와 구국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에 피 흘리고 쓸어 지면서까지, 아니 거리를 피로 물들이고 시체의 더미를 이루면서까지 불멸의 꽃을 피게 했다.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이 없건만, 살아서 조국땅을 욕되게 하느니 보다 그 값진 생명을 받쳐서라도 민주주의를 되찾아서 조국땅을 빛내겠다는 순수 이념이 내뱉는 정열이 있었고, 그 정열은 개인의 인격과 ‘최선아(最善我: Best self)의 실현’을 위한 자유를 존중하는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곳에 연유하였던 것이다.
4.19는 우리민족의 민주주적 지향과 정의를 위한 불굴의 항거정신으로 전세계를 감격케 했다. ‘한국 학생을 본 받으라’ 는 감격적인 외침속에 토이기(土耳其: 터키)의 이스탄불 대학생 수천명이 메데레스 독재정권에 맨주먹으로 대항.궐기한 것도 그해 4월 28일이였다. 영국 <타임즈>지는 4.19의거를 ‘개인독재에 대한 자연적이고도 불가피한 반항’이라 했고, 런던의 <헤랄드>지는 ‘어떤 정부건 때가 늦은 뒤까지도 증오(憎惡)의 씨를 뿌리며 정의를 박찰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구집권과 독재연장의 망상을 밀어 씻은 학도를 선두로 한 국민적 분노의 거센 물결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 장미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지칭되던 민족적 오욕(汚辱: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함)을 맑금히 씻었다. 그뿐이랴 한국민의 정의감과 용기를 세계에 과시하고 시범(示範: 모범을 보임)했다. 불의(不義)는 장구(長久: 매우 길고 오래)할 수 없고, 시대의 진운(進運: 진보할 기세나 기운)은 수하(誰何: 누구)라도 막을 수 없으며 독재와 협잡(挾雜: 남을 속임)은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을 4.19는 국사와 세계사에 낱낱이 기록해 주었다.
이와 같이 4.19 혁명이 대내외적으로 민주주의를 소생케 하는 기초를 닦았고 대외적으로는 한국관(韓國觀)을 바로잡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이 맑고 회사한 한 송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하여 너무나도 비통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부푼 희망을 가슴에 안은 채 수 많은 학생들이 숨을 거두어야만 했고, 평생을 피눈물 짓는 불구가 되어야 했다. ‘자유의 나무는 학정자(虐政者: 포학하고 가혹한 정치을 한 사람)의 피에 젖음으로서 성장한다’고 프랑스의 어느 혁명가는 말하였지만 한국에서는 항의하는 젊은 학도의 피에 젖어 제2공화국이 싹터야만 했다. ‘참에 살고 의(義)에 죽자’고 당시의 학생들이 피묻은 손에 쥔 프래카드는 표방했다.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숭고한 의기가 일진(一陣: 한 무리)의 청풍(淸風)이 되었고, 시민의 의분(義憤: 의로운 분노)을 크게 자극했었다. 참살된 학생이 시체로 발견되자 민중의 분노는 격화되었고, 총탄이 백화(白畵: 흰색그림, 대낮)에 난무하며 마구 군중을 파고들자 거센 노도(怒濤)는 포효(咆哮) 했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한 씨가 되었었다. 이 같이 피를 뿌리며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그 정도의 희생으로 그쳤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하게 여겨야 했다. 만일의 경우 우리 한국이 국제적으로 고아의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도 가혹한 살상행위와 무자비한 피의 숙청 그리고 전율(戰慄: 몹시 두려워 몸을 떰)의 탄압으로 보다 큰 희생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4.19를 세계사에 기록된 위대한 여러 혁명과 견주어 볼만도 하다. 그것의 의의와 보람이 결코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3.1 운동의 목표가 민족자결에 있었고 4.19의 그것은 민권의 수호였다. 전자의 것이 외적에 뺏긴 국가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민족운동인 동시에 그 동원도 거족적이었던데 비해 후자는 국민주권을 부정과 강압으로 찬탈하려는 자들에게 항의하여 궐기한 주권의 전취(戰取: 싸워서 얻음) 또는 확립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민중의 분노를 대변하였던 동학당(東學黨) 궐기까지 합하면 이 3대 혁신운동이 시대에 따라 조건과 목표는 달랐으나 일관(一貫)하여 흐른 정신은 불의에 항(抗)하는 정의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겨레의 긍지로 삼을 수 있다. 3.1운동이 곧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25년뒤에 해방을 낳았고 4.19가 혁명을 완결하지는 못하였으나 봉건사조와 관료잔재를 씻는데 큰 진전을 보았다. 외국의 사례를 들어보면 중국의 5.4운동과 프랑스 대혁명이 4.19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5.4운동이 그 동기와 목적이 외세 축출에 있었지만 학생대열이 선봉에 섰다는 점과 신구(新舊)중국의 분기(分岐)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4.19 성격과 비슷하였다. 민중의 봉기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앙샹․레짐(Acient Regime: 구체제)’의 압정을 타도하며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 닦고 민주주의 원칙을 확립한 바 그 성격과 결과를 같이 하고 있다. 4.19가 유혈의 참극을 빚어내긴 했으나 이른바 신격화된 카리스마적 절대군주 제도를 무너트리고 국민주권에 입각한 참된 의회민주정치의 길을 개척했다는 영국의 명예혁명과도 비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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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꽃으로 숨져간 영령들은 눈을 뜬 채 명복(冥福: 저승에서 받는 복)할 수 없고 아직 병상에 누어 신음하는 부상자조차 목메인 소리로 울부짖어야할 숨 가쁜 현실이고, 봄에 거족적인 반성과 단합된 분발을 다짐하면서 국운의 광정(匡正: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침)과 민족중흥의 계기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4.19의거 정신을 되살려 인간의 존엄과 정의와 사랑의 귀한 가치를 재인정하고 정권의 평화적 교체와 건전한 민주정치가 이룩될 수 있는 정치풍토를 조속히 마련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한 민생고의 해결에 전력을 경주하는 직진이 있어야 한다.
4.19 세 돌을 맞아 의거의 성격과 뜻과 정신을 되새기면서 전국민의 총단합 결속을 다짐하는 교훈의 날이 될 것을 믿는 바이다.
※ 편집자주 : 4.19는 올해로 53주년이 됐다. 3주년이 되는 1963년에 쓰여진 이 사설은 4.19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인지 당시의 생생하고 처절한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전세대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것임을 많은 이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글이 길고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중략했음을 알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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