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李容吉)
H야! 누구에게나 길은 멀고 해는 짧은가보다. 우리의 정열은 식어가고 벌써 하루의 황혼이 기어드는 이 시간, 나는 멀리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저가는 낙조를 몸에 받으며 이제까지의 며칠 동안의 사연을 전한다. 곧 탐라의 장이라 이름 붙여둔다. 너와 헤어진 21일 밤10시 20분 출발,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목표역에 도착했을 때는 움쩍하는 하늘에서는 야속한 궂은비만이 쓸쓸히 맞아주더구나.
오후 6시까지는 자유시간이지만 그치지 않는 궂은비 때문에 오전 해를 여관방에서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시간의 흐름이었다. 다행히 오후에는 유달산을 올라 목포시를 관망하였다. 부여나 경주를 인공적으로 다듬은 미(美)라면 목포는 자연적인 순수미를 간직한 아름다운 한쪽의 풍경화라고 할까? 6시 “황영호”라는 배에 몸을 실어 부푼 꿈을 안고 이국을 찾는 관광객인양 많은 기대와 호기심 속에 배는 서서히 올망졸망 섬과 섬 사이를 지나 노을진 바다를 전진! 전진하였다.
H야! 말이다. 우리 충청도 산골 놈들 중에 배타본 사람은 극히 적잖냐? 극소수를 제외하곤 전무(全無)라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리만큼 적은데 배를 탄 기분에 갑판에서 뽑는 노랫소리는 지휘자 없는 교향악단의 연주자라고 해두자. 진도에 잠깐 들린 후 88리의 해로를 달리는 불도 없는 운전실에는 키를 돌리는 항해사의 두 눈이 유난히 반짝이고 이따금 울리는 고동소리는 만월(滿月)을 며칠 앞둔 밝은 하늘에 길고 구슬프게 메아리 쳤다.
제주항에 새벽 3시 50분 도착 근 9시간의 항해에 지저분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우리는 축 늘어졌고 아무도 없는 새벽 항엔 냉기만 오싹했다. 동쪽 해안을 따라 제일 먼저 찾은 곳이 ‘김녕사굴’로 이곳의 길이는 200m 높이 10m 되는 곳으로 대사(大蛇:큰뱀)에게 1년에 한 번씩 주포(酒布:술과 베)와 처녀를 바쳤다는 처량한 전설이 있는 곳이다. 다음 방문지가 제주목장으로 이곳에 도착했을 땐 아리조나 카우보이나 된 듯한 시원한 기분이었으나 실망도 크게 국유(國有)에서 사유(私有)로 넘어와 아직 정비가 안 되어 있고 멀리 아득한 목장의 철책 속에는 이름 모를 새들만 지저귀고 있는 허한 벌판을 뒤로 해맞이로 유명한 성산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높은 대암봉을 바라보며 기울어진 초여름의 하늘아래 모닥불 옆에 떠는 해녀들의 모습도 있었다. 서귀포에 도착했을 때는 거리엔 땅거미 젓고 신축하여 이전한 제주농대는 건물만 뎅그러니 넓은 들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여장을 풀었을 땐 남국의 가로등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H야! 그날의 바다관망은 최남단이라고 해두자. 남태평양에 연결된 이 해변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젖었다. 나도 한국인이요 다 같은 감정을 소유한 같은 백성으로 평화선 양보부당하다 하여 대일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하는 이때 나는 여행이라는 이름아래 멀리 여기까지 와서 눈앞에 평화선을 보니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허나 좀 더 평화선을 자세히 알아 마음속 결심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나 혼자 위로를 가졌다.
끝없이 넓은 광활한 바다, 한없이 넓고 한없이 맑고 한없이 깊고 한없이 푸르른 바다는 곧 마음인 것이다. 이다지도 절실하게 바다의 마음을 느껴보기 오늘이 처음이구나. 한없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도 바다는 말한다. 호흡한다. 살아 움직인다. 바다는 예언자요. 신의 마음이요. 바다의 마음은 곧 너의 마음인 것이다. 찰싹거리는 파도소리는 어느 선녀의 몸부림인듯 싶고, 쉬지 않는 초저녁의 해풍은 꼭 네 향내를 느끼게 하는 거룩한 저녁이었다. 바다! 정말 정답고 부드러운 그 이름 속에 내가 있으니 너를 앞에 둔 것 같은 푸근함, 아득함이 깃드는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가 고달프고 복잡했더라도 지그시 눈 감고 밝아올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올바른 삶의 태도인 것 같이 제멋대로 날고 있는 갈매기에게 나는 약속을 했다.
H야! 하늘에는 벌써 별들이 총총 늘어가고 있고 이따금 지나는 구름과 달이 숨바꼭질할 때 나는 외로운 별들이 모두 숨죽이고 몸을 떨며 네 맑은 눈물을 통하여 빛나는 먼 후일을 너만은 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인간이란 누구나 시장기 같은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남모르는 그리움을 지니고 살진데 진리가 메마르고 사랑이 메마른 현실에서 외롭고 어려울 때 인간의 애정이 순수하게 표현되는 것이며 빈곤과 기아 속에서 참사랑의 맛이 들어나는 법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인간의 뜨거운 정신적인 교류 혼(魂)과 혼(魂)의 교류는 영원불변이다. 그렇다. 너와 나의 영원한 교류, 이것은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 이 엄숙한 사실에 나는 고요히 머리 숙이니 하는 수 없이 잡아보는 손이 아니고 왈칵 치미는 뜨거운 사랑으로 마음속 깊숙이 손잡아보는 마음의 착한 벗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구나.
H야! 너무 시간이 깊었다. 나는 나의 공허한 마음들에 희망을 채우는 해심(海心)이 수평선 끝에서 푸른 은하(銀河)를 건너 은은히 나의 마음에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애인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해심(海心)의 손길이 적막한 내 가슴속에 희망에 타는 불길이 되어주는구나. 그러나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 될 슬픈 운명이 나를 적막 속에서 보내 주었단다.
<제863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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