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란 하늘을 향해 가만히 안기어 보고픈 심리다. 무엇이 이루어질듯 하다가 날이 가고 무엇이 나타날 듯 나타나지 않은 채 세월은 짧고 꿈 많은 좁은 가슴에 이슬이 서글프다. 저 멀리 초록빛 흐르는 숲에 이별이 있었건마는 뭇사람들은 모르는 양 붉은 그늘을 쫓아 흥겨워한다. 지난날 아직 어린 소녀시절이 못 견디게 그립건마는 마치 홀로 울며 떠나려는 한 잎 낙엽과 같이 언제까지나 가지 않으면 아니 될 네 길 위에서 정 깊은 숲이 먼빛에 보이기를 알뜰한 마음에 도사려 보아도 벌써 가을이 오래인지라 바람은 낙엽을 마구 굴리고 공허에 떨며 우는 빛 잃은 가지는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표정이다. 한 잎 두 잎 가지런히 져가는 낙엽의 생리. 적막하고 고요한 달 밝은 밤 귀뚜라미 구슬피 우는 소리와 더불어 하루의 우울한 회한을 잊고 조용히 명상하노라면 낙엽 지는 소리뿐이다. 이것이 가을이 가져오는 쓰라린 상처인가 보다. 가을이라는 순환적 과정은 정서의 계절이기 때문에 인생을 한 번 조용히 음미해 볼 기회를 가져다준다. 학구의 문을 찾아 희망에 가득 찬 앞날을 둘러보고 새로운 기분으로 주위의 생활환경을 정리해 보는 것은 우리 젊은이의 특전이 아닐 수 없다. 아득히 무슨 소리가 들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펜을 잡고 앉았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나무람과 원망뿐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새하얀 구름이 끝없이 넓고 한 없이 높은 하늘 아래 곱게 형형색색으로 물들은 단풍잎이 애절하리만큼 묵묵히 날려 떨어지는 것은 정녕 가을의 신호등인 양 아스팔트 위를 멋대로 뒹구는 모습, 오색영롱한 캠퍼스의 이곳저곳 모여앉아 까르르 웃으며 계절에 대해 좀 더 센치하겠노라고 낙엽 줍는 여학생의 발자취고 자연의 철칙인 양 뚜렷하게 언제까지나 빛날 것으로 믿는다. 아무는 보람 없이 씹어 삼킨 1년이었다. 그래도 싱싱했다는 기억 때문에 강물이 흐르고 구름이 흐르는 시간의 파아란 하늘 밑에서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은 송이 송이가 피곤한 줄 모르고 견디어 온 것이다. 드높이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니 아쉬움을 간직한 채 혹은 아직도 그 무엇을 하려함인지 더는 모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도 있다. 애걸하는 것도 생의 마지막 운명을 재촉하는 듯싶다. 수줍어 얼굴 붉힌 숱한 낙엽들이 가엽게도 이곳 정원에 굴러다닐 때는 더 할 수 없이 서글퍼진다. 이제 굴러왔다가 다시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가야만 옳단 말인가? 나는 손에 단풍을 쥔 채 그곳을 떠날 줄 모르고 멍하니 숱한 계절의 낙오자들을 바라본다. 노을 짙은 대지 속에 말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그 어느 애화(哀話)를 이야기하듯 몰아치는 찬바람에 일편의 반항도 없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는 거침없이 황야를 헤매다가 고달픈 그 몸은 모퉁이 굽어가는 그 어느 돌담 밑에서 쉬려는가 보다. 너울 안에 구름 진 사록(事錄)처럼 대륜(大輪)에 거짓 없이 너의 속절없는 파아란 가을의 파편에 찢어진 서러운 영상, 외로움에 공허한 마음을 움켜진 소녀의 가슴인 양 접점 잃은 평행선으로 사라져 가는 한결같이 엉클어진 가랑잎, 또 내일은 누가 내게 더 무거운 의미를 부어준답니까? 파르스름한 눈물이 흘러져 하늘하늘 떨며 수줍음을 안은 슬픈 여인상, 난 떨어지며 맺는 너의 약속을 지키겠노라.
지향 없이 흐르는 외로운 나그네, 젊음의 애착도 얄궂은 절망 앞에 이슬인 양 쓰러지면 끝없는 허공에 맴도는 마음, 나도 서글픈 위선일랑 다 집어치워 버리고 너와 같이 유람하고 싶다. 네 잎 크로버를 찾으며 부르는 콧노래도 지금은 잊고 있다. 행운을 찾아보고자 하던 시절이 어지 그립지 않으랴마는 피고 우거지고 퍼진 꽃 사이를 벗들과 손목을 마주잡고 웃으며 즐겨 노래 부르며 희희낙락 다니던 나의 추억이 그림자로 변하여 앙상한 가지에 텅 빈 마음으로 매달린다. 항상 부족함 없는 마음으로 양식, 삶의 양식을 풍부히 준비하게 될 때에 비로소 T.S.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 말한 ‘텅 빈 사람’이 아닐 텐데…
나는 이제의 단풍과 나를 뒤돌아본다. 그리고는 또 망설여진다. 이렇듯 가을이 되면 그 낙엽을 밟으며 한 해의 저물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노라면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깨트리고 어디선지 종소리가 늦가을의 외기(外氣)를 흔들며 은은히 들려온다. 그 실낱같은 소리로 한순간 주위는 다시 무섭도록 고요해지지만 달은 훨씬 떠올라 노송에 걸려 있었고 구름이 계곡을 채워 봉들만 사태를 나타내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밀리고 떠나는 수없는 발걸음들, 이들 모두가 삶의 보람을 찾기 위해서인지 이제 가을의 티를 벗는 주변의 공기마저 싸늘해진다.
곱게 단장해 인간을 즐겁게 해주다가 끝내는지는 낙엽들이 인간의 눈물까지 자아내야 옳단 말인가! 진정코 가을철은 변화무쌍한 계절이다. 나뭇잎이 하나 떨어질 때 머리에서 슬픈 추억이 하나 지워주기를 바라면서 거칠고 딱딱한 정막을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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