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의 첫 기억은 7살 때다. 그 시절에 난 사람이 많고 제사도 지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친가를 외갓집보다 좋아했다. 명절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큰엄마 댁으로 내려갔고, 어린 나에겐 동그랑땡 만들기만 허락됐다. 음식을 만드는 건 즐거웠고 명절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명절을 싫어하게 됐다. 명절 증후군이 생길 정도로.
어느 순간부터 이제 다 큰 막내 집 딸은 명절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3인분의 설거지를 하고, 3번의 밥상을 차리고 상을 닦았다. 내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엄마가 해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 남자 어른들 뿐이었다. 고모들은 명절 당일에 친정에 왔지만, 엄마는 친정에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남자가 주방에 들어오는 건 이상한 일이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밥을 차려준 후 따로 작은 상에서 남은 반찬에 밥 비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어렸을 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이런 상황이 점점 불편해졌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쓰던 사춘기 시절, 친척 중 한 분이 나에게 ‘피부과 가야겠네. 여자는 피부가 좋아야 돼’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엔 ‘여자는 뚱뚱하면 안 돼’, ‘여대생 옷이 이게 뭐니’, ‘뭘 그렇게 열심히 사니? 그냥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 시집만 잘 가면 돼’, ‘여대생 웃음소리가 그게 뭐야’ 같은 말들을 들었다. 과체중인 사촌오빠는 듬직했고 과체중인 나는 뚱뚱했다. 내 웃음소리가 큰 것은 이상했고 사촌오빠의 웃음소리가 큰 것은 호탕한 웃음이었다. 기분이 나빠도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수긍하며 웃어야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컸다. 비혼이란 선택지는 말도 안 되는 일. 결혼 후 임신은 당연한 과정이다. 여자로 태어난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의 인생’, ‘나의 커리어’, ‘나의 몸’, ‘나의 꿈’이 소중하다. 지금 나에게 결혼과 출산은 이 모든 것을 ‘리셋’ 시키는 장애물이다.
차별은 먼지처럼 쌓인다. 소리 없이, 쌓이는 줄 모르게 서서히 쌓인다. 누군가 건드리거나 바람이 불면 일어나는 먼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없지 않고 우리 주변에 떠다니다 쌓인다. 문제는 누군가 문제라고 말해야 문제가 되는 것처럼, 차별은 누군가 이것이 차별이라 말해야 인식하게 된다. 그래야 청소할 수 있다. 필자는 묻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누군가를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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