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충실히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으로, 병자호란 때에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후 화친을 맺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패배’라는 정해진 결말로 가는 동안 영화의 온도는 대체로 차갑고, 카메라의 색감은 파랗다. 또, 동적인 전투 장면보다 성벽 안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정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는 만큼 <남한산성>은 담담하고도 꿋꿋하게 당시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덕분에 서사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재미는 덜한 건조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만큼 그때의 암담함과 참담함이 전해지는 영화를 찾기는 어렵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해당 문장은 영화의 제10장에 붙는 글귀다. 이는 청과 화친을 맺자는 주화론을 ‘살아서 죽는 길’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을 ‘죽어서 사는 길’로 나타낸 말이다. 과연 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쉬운 일일까? 영화를 보기 전의 나라면 당연하단 듯이 살아서 죽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선택에 망설임이 분명히 존재하게 됐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을 교과서로 배웠던 때를 생각해 보면, ‘옳았다’는 평가는 대체로 주화파에 쏠려 있었다. 이미 결말을 아는 현재의 시점에선 주화론이 맞는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작중 주화론을 대표하는 최명길과 척화론을 대표하는 김상헌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끝내 화친을 맺는 결말의 순간에도 무엇이 옳은 길인가란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둘 다 옳기 때문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작중 날카로운 설전을 펼치며 극명한 대립에 놓여 있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둘 모두 서로의 목적이 같으며, 상대 의견 또한 마땅함을 알고 있다. 영화는 정반대로 보이는 최명길의 길과 김상헌의 길 모두 그때 당시엔 바르고 옳은 길임을 보여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반대의 길 또한 옳은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영화의 시작과 끝만 살펴도 알 수 있다. 영화는 청군 앞에 홀로 찾아간 최명길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바로 다음엔 노인에게 길 안내를 받는 김상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당 장면에서 김상헌은 만일 청군이 오면 노인이 자신에게 길 안내를 했던 것처럼 청군에게도 길 안내를 하고 곡식이라도 얻고자 함을 알자 회유하려 하지만 회유가 실패하자 망설임 없이 노인을 칼로 베어 죽인다.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최명길과 김상헌 두 사람을 오프닝에 제시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최명길은 항복하는 인조의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 분노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돌아간 궁의 옥좌는 공허해 보이기까지 한다. 김상헌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란 대사를 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한다. 결말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서로 닮아있다. 시작에선 극과 극으로 보이던 두 사람이 끝에선 같았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구조이다.
가끔 내 생각과 주장이 옳다고 확신할 때, 반대 입장은 그른 것으로 간주하고 배척하는 일이 있다. 영화 속에서도 최명길과 김상헌을 제외한 대신들은 이러한 닫힌 태도를 유지한다. 자신만이 옳다고 믿으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다. 영화는 안으로부터의 멸망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태도가 오만이며, 척화론도 주화론도 아닌 이런 닫힌 태도가 비극의 원인임을 보여준다. 영화 <남한산성>은 서로 목적이 같은데, 수단을 놓고 옳고 그름의 흑백을 따지는 것은 무용함을 말하고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두 입장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함께 일을 도모했다면 결말은 지금보다 덜 씁쓸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의 대립은 내려놓고 나의 신념 반대에 그대의 신념이 있음을, 나의 옳음 반대에 그대의 옳음이 있음을 겸손히 되새기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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