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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소설부문 당선작 - 희극적인 삶
제 854 호    발행일 : 2012.11.05 
설반석(국어국문학과·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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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다리에 엄지발가락을 부딪쳤다. 선정은 숨도 쉬지 못하고 허리를 꺾었다. 눈물 나게 아프고, 동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왜 짜증나는 일은 한꺼번에 터지는 건지. 간밤에는 모기가 극성을 부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거기에 알람까지 고장 나서 아슬아슬한 시간에 일어났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공장에 달려갔더니 이번에는 부장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에 제출한 1/4분기 보고서에 누락 사항이 있다고 선정에게 욕을 해대는 것이다. 아니, 아르바이트 단기직인 선정에게 보고서 작성을 시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인데, 그게 잘못됐다고 또 타박을 하다니.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건 다 뻥이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는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하냐며 칭얼거린다. 휴학계를 내고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원비 겸 생활비를 버는 아르바이트 중이다. 일을 하느라 전화나 문자에 일일이 대답해주기가 어렵다고 기껏 말을 했는데도, 이 여자애는 무슨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귓구멍이 막힌 건지 알아듣질 못하고 어리광만 부린다.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된 아픔과 짜증의 물결이 거친 기세로 머리를 때린다. 오 이런, 편두통이 또 도진 것 같다. 몸의 위아래에서 동시에 꽝꽝거리는 끔찍한 느낌을 억지로 누르며 선정은 절뚝절뚝 다시 일을 시작했다.

평범한 일상이구만, 뭐.

미칠 것 같은 하루를 마치고 피로를 풀기 위해 앉은 맥주집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는 놈이 지껄이는 소리가 고작 이따위다. 재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즘 내가 얼마나 힘드냐면, 으로 시작하는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9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고 학원에 다니는데, 부모님이 내주는 학원비와 생활비로 놀고먹는 놈이 무슨 힘든 일이 있다고 한탄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하루 열두 시간씩 고된 노동을 하고 돈을 아끼느라 식사도 부실하고, 몸도 아픈 나와 비교하면 넌 얼마나 행복한 삶이냐.

재준은 또다시 그래도 넌 여자친구라도 있잖아, 로 시작하는 헛소리를 시작했다. 다 때려치우라고 맥주잔을 집어던져버리고 싶다.

연기자가 될 거야. 연기 공부를 한다는 말을 하면 백이면 백 너 연예인 되려고? 하는 반문부터 나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접해본 문화매체라곤 텔레비전 밖에 없는 아이들 머릿속은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다. 없는 형편에 용돈을 아끼고 모아서 연극을 보며 자란 선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서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김명곤의 ‘격정만리’ 대본을 연습하고, 윤심덕의 ‘사의 찬미’ 대본을 구하기 위해 동대문의 고서점을 찾아 헤맸다. 중고 캠코더를 사서 내 모습을 찍어 보며 목소리의 톤과 표정, 몸짓을 연습해왔지만 그것은 결국 자위행위와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꿈을 좇아 괜찮은 대학의 법과대학에 들어왔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선정의 학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입생이 들어오지 않는다. 로스쿨의 도입으로 사법고시가 사라지고 법대를 모두 없앤다고 한다. 수년간 법전만 파먹던 전국의 고시생들이 사법고시가 사라지기 전에 붙기 위해 말 그대로 눈에 불을 켜고 있다. 그렇다고 경쟁을 포기할 이유는 없지만, 애초에 선정은 검사나 변호사같은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사람은 인마, 누구나 다 힘든 거야.

끝까지 속을 뒤집어놓는 소리를 남기고 재준이 일어섰다. 더 이상 화를 내기도 피곤하다.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무릎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꿈이고 나발이고 당장 쓰러져 죽을 것 같다. 아버지는 선정에게 의절을 선언했고, 아버지 눈치만 보기에 열심인 어머니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달동네 쪽방에 방을 얻었지만, 스물여덟 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선정은 행복했었다. 빌어먹을, 이젠 행복도 과거형이구나. 이게 다 연기학원 등록비가 더럽게 비싼 탓이다.

가로등도 뜸한 동네 초입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골목 쓰레기봉투 사이에 시커먼 게 보인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다가 등허리에 소름이 쫙 돋는다. 사람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다가가보니 어떤 여자가 쓰러져 있다. 강도나 퍽치기에게라도 당했나 싶어 걱정하는 찰나에 쓰레기 냄새로도 덮이지 않는 엄청난 술냄새가 확 풍긴다. 쓰레기봉투를 무슨 곰인형마냥 껴안고 웅얼거리며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지 안방인 줄 아는 모양이다. 가만 보니 헝클어져서 그렇지 좋은 정장을 입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국물에 반쯤 잠겨 있는 핸드백도 고급 브랜드다.

참, 뉘 집 자식인지 앞날이 훤하다.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놓이지만 다른 걱정도 고개를 든다. 그렇잖아도 이 근처는 치안도 좋지 않은데.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으면 해코지 당하기 딱 좋은 모습이다. 머릿속에는 고슴도치 한 가족이 들어와 있고, 다친 엄지발가락에서는 퉁 퉁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다 온 몸이 피로에 푹 절인 배추같은 상태지만……. 그냥 놓아두고 내 갈 길 가기에는 양심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봐요! 이봐! 아가씨!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얌전하게 몸을 흔들다가 아예 뺨을 철썩철썩 때려봤지만 정신을 못 차린다. 일단 쓰레기더미에서라도 꺼내줘야겠다. 몸을 질질 끌어내는데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부여잡고 놓질 않는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손아귀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억지로 손가락을 떼어내려 해도 봉투를 놓질 않는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화가 나서 확 잡아챘는데, 순간 봉투가 북 찢어지며 고등어대가리와 다 쓴 생리대같은 것들이 여자에게 쏟아져 내린다. 물론 선정의 옷에도 고약한 것들이 튀어 묻었다. 정말……. 다 그만두고 싶다.

오빠?

아, 정신 차렸어요? 이건 당신이 그런 거예요, 댁이 어디세요, 하고, 갑자기 정신을 차린 여자에게 당황해서 주저리 주저리 주워섬기는데 여자가 선정의 바짓가랑이를 확 붙잡는다.

오빠…….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버리지 마. 알잖아, 나 오빠 없으면 못 사는 거. 응? 어흐어어, 어흐어…….

선정은 깨달았다. 아, 내가 똥을 밟았구나. 아마도 이 여자는 남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머리 꼭대기까지 들이붓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걷다가 상대적으로 따듯해 보이는 쓰레기들 사이로 기어들어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오빠밖에는 없어 어흐어엉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 현민이랑은 정말 그냥 친구사이야, 어흐어어, 여자는 쉼 없이 말을 쏟아낸다. 선정이 어깨를 붙잡고 홱 홱 흔들었지만 전혀 정신을 차리질 못한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보던 대본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기막힌 계책이 떠올랐다. 사실 평소 선정의 성격이었으면 조용히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프고 화가 나고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끔찍한 날이다.

선정은 가볍게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와 눈높이를 맞춘 뒤 어깨를 힘 있게 쥐었다. 여자는 마스카라가 다 번진 무서운 눈으로 제대로 초점도 맞추지 못한 채 선정을 마주본다. 제대로 될까? 끝까지 마음속이 켕기긴 하는데, 선정의 입은 자연스럽게 진지한 대사를 내뱉고 있다.

네가 뭐라고 하건, 난 널 용서할 생각이 없어. 오빠……. 어흐허헝…….

그러나! 얼굴이 확 달아오르지만, 다년간의 연습으로 빚어진 표정연기와 목소리 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너의 얼굴에서 보석보다 귀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나는 더 참을 수가 없구나. 여자의 얼굴에서 희망이 피어오른다. 그런데 이 여자 정말로 못 알아보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선정은 대사를 치는 순간 아저씨는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는 말이 먼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에라, 술기운이 확 오르는 것을 느끼며 선정은 한번 갈 데 까지 가보자는 대책 없는 결심을 세웠다.

너의 고귀한 미소가 어두운 내 삶에 단 한 줄기의 찬란함이었다. 오, 신이여! 왜 그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한 손을 가슴에, 다른 손을 쫙 펼친 채 가로등 빛 희미한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신을 부르짖는 선정의 모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성스러웠다. 여자는 양 손을 기도하듯 입술에 대고 눈을 총총 빛내고 있다. 수사법 그대로 제 부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한 여자, 단 한 명의 관객 앞에서 선정은 과감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옆 골목에서 개 짖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오빠아아, 어헉헝헉, 날 용서해 주는 거야? 그런 거야?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여자의 목소리도 어쩐지 연극 톤이다. 선정은 여자를 찬양하는 낯부끄러운 대사를 한참 하다가, 감동의 도가니탕인지 술기운의 진창인지 알 수 없는 것에 푹 빠져 있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클라이맥스를 올렸다. 네가 여자든, 남자든, 외계인이든 관계없어! 내 심장이 이토록 뜨겁게, 너를 향해 외치고 있기 때문이야! 모든 것을 용서하겠어. 그저 내 곁에만 있어줘, 나에겐. 선정은 마지막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나에겐 오직 너의 사랑이 필요할 뿐이야.

꺄……, 하는, 탄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여자가 얼굴을 확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감격에 울먹거린다. 사실 마지막 대사는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에서 떠올린 것이다. 가짜 배우와 진짜 주정뱅이가 있는 골목길에는 구역질나는 냄새와,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와, 그것들로도 미처 지울 수 없는 성스러운 사랑의 힘이 가득했다.

저기.

머쓱해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쭈뼛거리며 돌아보니 경광봉을 든 경찰관과, 그 옆에서 먼 산을 보며 발로 땅을 슥슥 비비고 있는 경찰관이 서 있다. 신고를, 크흠! 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만. 일행분이신가요?

아닙, 니다. 아, 그러세요? 네……. 그, 저기,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죄송하다뇨. 덕분에 좋은 구경……. 아니 좋은, 좋은 것. 아무튼 좋은 경험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정은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사실 왜 사과해야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지구가 폭발해 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한 명의 경찰은 끝까지 선정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어서 다리가 떨려온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성을 경찰관들에게 맡기고, 선정은 거의 뛰다시피 달동네의 가파른 둔덕을 올랐다. 경찰관들에게는 향후 십 년은 술자리에서 씹을 수 있는 안주거리가 되었으리라. 그래도 조서는 꾸며야 해서, 잠시 서까지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네.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선정은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복도 많은 자식.

박재준은 대책이 안 서는 친구다. 크게 비웃음을 당할 것을 예상했지만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 이 녀석에게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인다. 넌 그런 식으로까지 여자랑 썸씽이 나냐?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데? 난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여자한테 인기가 많다, 뭐 이런 식이냐?

그런 게 아니잖아. 한숨을 푹 쉬며 선정이 차분하게 얘기했지만 박재준은 괴상할 정도로 길길이 날뛴다. 염장을 지르는 거냐? 내가 요즘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난 선정이 네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영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아주 정색을 하고 화를 낸다. 비웃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던 선정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나 두 달 뒤에 시험인 거 몰라? 네가 하도 간곡하게 이야기 좀 하자기에 뭔가 했더니……. 고작 그따위 이야기 하려고 일분일초가 아쉬운 고시생을 부르냐?

선정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하다. 재준을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집안 사정이니 개인 사정이 어떻든 간에 공무원시험이라는 큰 벽을 마주한 입장에서는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가기 마련이다. 더구나 특히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차단하고 있으니 외로울 만도 하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재준이 슬며시 던진 말에 선정은 오만 정이 다 씻겨 내려가고 말았다.

근데 그 여자……. 예쁘디?

심해로 침몰한 정신이 바닥을 더 뚫고 들어가 맨틀층에 도달해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선정은 작별을 고하고 일어섰다. 여자친구에게 털어놓을까? 하도 기막힌 심정이라 느닷없이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홱홱 저었다. 위로는커녕 어딜 싸돌아다니면서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냐고 쏘아붙일 게 뻔하다. 그럼 당연히 싸울 것이고, 작년 가을에 같이 카페 같던 여자가 그 여자지! 대답하란 말이야! 같은 종류의 타박을 들을 것이다. 학부 수업 조별과제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자에 대한 반응이 그 모양인데, 이 일을 이야기하면 대체 어떤 난리가 날 지 생각도 하기 싫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선정 씨 되십니까? 그런데요. 저 효순이 남자친구되는 사람입니다. 네? 어제 효순이가 술에 취해서 실례를 했다는데……. 이선정 씨 아니신가요? 아, 네. 아, 맞습니다, 네. 한번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어디시죠?

어제 그 여자는 경찰서에 가서 한숨 잔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여자 이름이 효순인가. 도회지 여성같은 생김새와 차림새였는데, 이름은 꽤 촌스럽다. 그보다 또다시 골치가 아파온다. 그래도 전화상의 목소리로 판단하기에 매너를 아는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다. 별 얘기는 없겠지, 그냥 ‘제 여자친구가 실례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정도의 사소한 일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저희 효순이랑 무슨 관계십니까?

아주. 가관이다. 선정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왜 내 주변의 인간들이 갑작스럽게, 한결같이 비정상적인 언행과 행동으로 날 괴롭히는 걸까.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즉답이다. 뭔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저렇게 무 자르듯 잘라버리는 사람에게는 아예 말을 꺼내기도 싫다.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시고, 골목길에서 그……. 그런 짓을 하다가 경찰서에 갑니까? 그런 짓이라뇨? 그런 짓이 대체 어떤 짓입니까. 선정의 말투에 조금씩 비아냥거리는 듯한 톤이 섞여든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남자가 테이블을 쾅 내리친다. 평소 같았으면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당황보다는 그냥 피곤하고 조금 화가 나고 귀찮다. 이 새낀 또 왜 이럴까요, 하나님? 불러본 지 십 년이 가까워지는 신에게 자문을 구해보지만 신에게서는 대답이 없다.

대체 무슨……. 무슨 상스러운 짓을 했기에 경찰도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겁니까, 네? 그런데 이딴 식으로 나와? 이 새끼야!

선정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차갑게 생각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그 여자 남자친구라면, 아마 이별을 통보하고……. 이별통보를 하긴 했는데 아직 마음은 남아있는 상태에서 내 얘길 들은 건가? 그런데 그 여자는 경찰서에서 남자친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완전히 술이 깨서 선정에게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서는 남자친구를 부를 의지조차 아예 보이지 않았었다. 물론 선정이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도 높다.

너 우리 효순이가 어떤 앤지 알아? 응? 지금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장미같은 여자라고!

여전히 차게 식은 머리로 남자의 비정상적인 언행을 관찰한다. 이 남자의 말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여자에 대한 이상한 환상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보통의 남자친구라면 자기 여자친구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저 남자는 멀쩡하게 생겨서는 저렇게 정신병자같이 벌컥벌컥 화를 내는 걸까. 게다가 경찰서에 찾아가서, 내 번호를 알아내서 연락을 했다고? 그게 가능한 거였나?

니가 현민이냐?

뭐?

별 생각 없이 푹 찔러봤는데, 남자가 정말 뭐에 찔린 표정으로 눈을 치뜬다. 선정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 니가 걔구나. 니 얘기 많이 들었다, 야. 선정은 자신이 약간 과장된 어투로 비아냥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 맙소사. 오 맙소사. 오 맙소사! 어제 그렇게 창피한 일을 겪고도 아직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화가 난 참이라 던진 거긴 한데, 말투는 자연스럽게 연극 톤이 된다. 에라 씨, 이제 나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초면에 먼저 말을 놓은 판에, 존대를 해 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뭐라고? 뭐라고……. 효순이가 내 얘길 했다고? 너 이 개새끼야, 너 효순이랑 무슨 관계야!

짜증 때문에 오히려 냉철해진 선정의 두뇌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마 이 남자는 그 효순이라는 여성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갈라서게 만든 장본인일 것이다. 여자가 거절하는데도 대놓고 작업을 걸었거나, 마치 자기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도 된 양 멍청한 짓들을 해댔겠지. 그것들이 하나씩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그녀의 진짜 남자친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했을 것이고……. 그럼 이 남자는.

너 스토커잖아?

현민은 가슴을 움켜쥐고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오늘은 찍은 게 잘 맞네, 이 찍기 운을 재준이에게 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선정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묘하게 익숙하다고 느낀다. 하긴, 이미 이 짓거리를 한 번 해 본 셈이니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구나……·.

그래, 네 얘기는 지저귀는 새들과 음침한 박쥐들에게서 충분히 들어 알고 있다. 늘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더군. 여기서 선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먹혀들까? 후후후, 넌 그녀가 왜 남자친구와 헤어졌는지 알고 있나?

현민은 헉헉대다가 씹어뱉듯이 외쳤다. 거짓말하지마! 거짓말! 이 사기꾼자식!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닐뿐더러, 아직 21세기는 오지도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이렇게 평면적이고 일원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걸 보면 세상이 발전할 날은 아직 요원하다는 뜻이다. 둘이 앉은 곳은 조용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현민의 말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인데, 지금은 현민의 외침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그들의 테이블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그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지지만, 이미 연기에 돌입한 선정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희미하게 비웃음을 띈 표정으로 현민을 내려다보듯 쳐다본다.

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넌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후후……. 그 믿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독침이지. 잠처럼 달콤하지만,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인 것이야. 물론 그 누구라 해도 생각할 수 없었겠지. 그녀의 남자친구는 표면적인 연인관계에 불과했다는 것, 그녀가 진정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야이 개자식아!

현민이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서자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이미 가까운 곳에서 이 테이블의 눈치를 보고 있던 종업원이 타이밍 좋게 다가온다. 저, 손님.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되니까……. 말씀을 조금만 낮춰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은 공손하지만 표정은 여차하면 둘을 끌어낼 각오다. 현민은 선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씩씩대고 있다. 선정은 싱긋 웃으며 예절바른 어투로 종업원을 잘 달랬다. 종업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일단 알겠다며 물러났지만 현민은 여전히 자리에 앉지 않는다.

앉으라구. 자네 이렇게 행동해서야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겠나? 교양 없는 남자에게 사랑을 건네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선정은 완벽한 각도로 물컵을 마치 와인잔처럼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신다. 일단 현민을 앉히는 데는 성공했고, 상황을 오해하게 만드는데도 성공했는데 이 다음은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어제 밤에는 그래도 꽤 생각을 한 뒤에 대사를 시작한 거였고, 상대방은 술에 떡이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데다 상대는 좀 비정상적이긴 해도 멀쩡한 정신의 성인 남성이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막막함과 함께 아련한 고양감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비록 관객이 가득 찬 객석을 향해서는 아니지만, 모노드라마를 연기해야 하는 희극인의 마음이 지금 나와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 물론 양지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할 수 없었어. 그녀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이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지. 우선은 되는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사를 치던 선정은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점점 쉬워지는 것을 느낀다. 좋아, 그럼 약간 로미오와 줄리엣을 패러디해서 대사를 해 보면 어떨까.

피로 피를 갚고, 눈물로 눈물을 닦아내는 우리 두 집안의 관계는 멀리 할아버지 대에서 갈라지기 시작했지. 두 분은 막역지우였고,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관계셨다. 하지만 민족의 뼈아픈 참사,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어. 그런데 그곳에서……. 두 분은 북한군과 남한군이라는, 적국 병사라는 형태로 다시 만나고 만 것이야.

좀 불안한 것은 현민이 의심의 눈초리로 얼마나 헛소리를 더 늘어놓나 일단 두고보자는 듯 선정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안 된다. 당장 이 남자를 처리하는 것도 어려워지지만, 무엇보다 선정은 여기서 물러서면 자신의 꿈에서도 한 발짝 물러서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왜 이토록 빠른 속도로 훼손되는가! 두 분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원래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인 우리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가 영원히 갈라서야 할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현민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린다. 오케이, 먹혀 들어간다! 선정은 좀 더 연극톤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오오 운명의 여신이여, 그대가 자은 실은 왜 이토록 가슴을 저밉니까. 왜 당신이 가진 운명의 천칭에는 사랑의 이루어짐이 그토록 무거운 추로 달려 있는 것입니까. ……그래, 우리는 이루어지려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을지도 몰라. 당장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이 부모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될 테지.

좀 과했나? 중세시대에나 먹힐 법한 대사를 늘어놓으며 선정은 현민 몰래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스토커는 눈알을 데굴거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미친 소리는 집어 치워, 어디서 웬 정신병자가 와서 난리야……. 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심하면 바로 선정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해댈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선정이 키워 온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주어진 대사를 끝까지 하는 기술이었다. 그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자네에게 그녀를 맡기고자 하네.

뭐?

그래, 살살 긁어 주었으니 이제 적당히 당기면 홱 넘어올 테지. 선정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밀고 당기기의 원칙에 충실하다. 되먹지도 않은 괴상한 얘기들로 낚싯줄을 한바탕 흔들어 놓았으니, 이제 살살 당기기만 하면.

자네야말로 진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지. 나와 그녀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야. 우리가 대체 언제까지 사회에 알려질 수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어. 내게는 너무나 벅찬 짐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지.

그게, 그게 무슨……. 무슨 말이시죠?

좋아. 존대로 돌아왔어. 속으로 쾌재를 올리면서도 선정의 표정에는 실낱같은 변화도 없다. 사실 선정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선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가, 속으로 느리게 5까지 센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현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눈빛은 좀 흐리게, 가슴속의 슬픔을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눈빛으로……. 조금 흐리멍덩하게. 거울을 보며 표정연습을 열심히 해 온 선정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눈빛이 그런 모양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영원히 줄 수 없는 행복을……. 자네가 그녀에게 주게.

현민은 상황파악이 안 된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이 때 쐐기를 박아야 한다.

오로지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네. 나의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이 맹세는 하늘의 별과 달도, 지하의 죽음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거야! 자네뿐이네.

선정은 똑바로 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리며 마지막 대사를 쳤다.

자네……. 뿐이야.

그리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조금씩 어깨를 들썩거렸다. 우는 연기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콧잔등 위에 얹은 채 인위적이지 않게 조금씩 떨어주며, 가끔 배를 꿀럭거리고 숨을 흐흐흡, 하고 들이마셔 준다. 자, 어떻게 나올까? 상대는 여자에 대해 상당히 비정상적인 집착을 가진 스토커다. 제일 치명적이고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선정이 던져 준 셈이다. 과정이 지나치게 극적이고 느닷없긴 하지만……. 먹이를 물 것인가? 선정은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며 한참 동안 우는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분 여쯤 지났을까. 현민이 잔뜩 쉰 목소리를 낸다.

제게……. 제게 그럴 권한이 있을까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그저……. 그저 스토커에, 지나지 않아요.

와자자! 해냈다. 선정은 울먹이는 연기를 하면서도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올해 남우주연상을 발표합니다. 남우주연상……. 이 선 정!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래, 이 정도면 된 거야. 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현민의 고백은 계속된다. 어떻게 효순을 알게 됐고, 얼마나 쫓아 다녔으며, 꿈에서도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정말이라고. 그런데 그녀를 저에게 맡기셔도 되겠어요? 정말입니까? 그녀는 장미처럼, 정말 한송이의 꽃망울처럼 아름다운데, 그런 효순이를 고작 저처럼 볼품 없는 놈에게…….

선정은 벌떡 일어섰다. 서, 선생님? 긴장이 풀려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순간적인 위기대처능력을 발휘해 선정은 웃을 뻔 한 얼굴 표정을 울먹이느라 찡그린 표정으로 살짝 전환했다. 남자는 등으로 대사를 할 때도 있는 법. 자신에게 뿌듯해하며 선정은 세 걸음 정도 묵직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멈칫, 발걸음을 멈춘 뒤 고개만 살짝 돌려서 속삭이듯 현민에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주게. 말을 하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 게 틀림없지만. 더 이상 자네와 그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나를 찾을 수도 없을 걸세.

무거운 어깨로 나서는 선정을 보며 식당의 사람들이 쑥덕거린다. 하지만 현민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다. 선생님! 어디로……. 어디로 가십니까?

아주 멀리……. 아주 먼 곳.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거야. 가장 끈질긴 운명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장 잘 훈련된 사냥개조차 냄새 맡을 수 없는 곳으로.

선정은 슬픈 표정으로 억눌린 미소를 지으며 식당의 천장을 응시했다. 뒤 돌아 있기 때문에 현민은 보지 못하지만, 이것은 희극인으로서의 예의다. 자네의 말이 맞아. 그녀는……. 장미지.

현민은 울음을 터트리며 선정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그를 잡지는 못했다. 혼자 테이블에 앉아 우는 남자를 힐끔거리며 다른 손님들이 여러 가지 추론을 시작한다. 현민은 그렇게 식당을 빠져나간 선정을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참 평범한 날이었다.

다치코마    2013-04-10 20:47:29  
확실히 잘 쓰셨네요
다치코마    2013-04-10 20:48:25  
앗, 다만 시제를 과거형으로 통일하면 더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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