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ㅁ
들어가며 민주주의는 이제 발달한 서구 국가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운영하는 보편적인 통치체제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는 40개국이 채 안 되었지만, 현재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혼합체제까지 포함한다면 110개국 이상의 나라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제 전 세계의 보편적인 정치제도가 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역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한 국가가 그 구성원인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평생 지속적이고, 매우 강력하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속한 국가가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냐는 우리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내가 속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있고, 우리는 당연한 듯 민주주의에 대해 일상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인민을 의미하는 demos와 지배를 의미하는 cracy가 결합하여 형성된 말로, 직역하면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조문은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 본래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정치는 이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여러 제약요건들로 인해 민주주의 본래의 의미가 현실에서 구현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대규모의 인구와 넓은 영토를 가진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므로, 인민의 대표자가 대신해서 국가를 통치하는 대의제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아무리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시스템이 발달하여 사람과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는 시.공간의 거리가 혁명적으로 가까워져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부정할 수 없는 일종의 법칙에 가깝다. 직접민주주의는 광장에 접근하게끔 하는 시간과 기술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디지털 시대의 과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주권은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란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즉,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시스템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이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한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대표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권능을 강조하는 ‘인민의 지배’란 어원 그대로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민주주의를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를 너무 이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실정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상적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통치나 권력, 지배와 리더십 등 실제로 민주주의를 작동케 하는 현실의 제도적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습득하는데 장애로 작동할 수 있다. 이상을 가지고 현실이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 이상이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여서는 안된다. 민주주의의 조건 필자는 현대 민주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 번째는 경쟁하는 두 개 이상 정당의 존재하는 다당제이며, 두 번째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누구나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이다. 마지막은 주기적인 선거가 이뤄지고 그 결과로 집권 세력이 교체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민주주의가 대의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여 그들의 이익과 요구를 정치체계에 투입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같을 수 없으므로 다양한 국민들의 욕구를 정치체계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계급과 이익, 이념을 대표하는 두 개 이상의 정당이 필요하다. 보통선거권 문제는 따로 논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역사적, 경험적으로 검증이 완료되었다. 자신의 의사나 의지를 표현할 수단이 없는 체제는 민주적이라 칭할 수 없다.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는 다당제와 보통선거권이 보장된 체제라 하더라도 주기적인 선거에 의해 집권당이 교체될 가능성이 없는 체제는 국민들이 합법적으로 정치권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단을 상실한 체제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결국은 쿠데타나 혁명에 의한 정치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집권 세력을 교체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의 존재와 이 제도에 대한 실질적인 보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와 정당에 관하여 민주주의와 정당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현실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다.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계급과 노동조합이 약화되면서 이을 기반으로 한 정당의 영향력 또한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으로 우리나라 역시 정당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 요즘의 안철수 현상은 이러한 현상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란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렇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각기 다 다르다. 따라서 그러한 시민사회로부터 분출되는 열망과 갈등의 절대적 수와 양 또한 엄청나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많은 이해관계와 요구, 갈등 등을 해결해야 할 정부 기구는 이를 해결할 만큼 충분한 물적, 인적, 금전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 하다. 그러므로 사회 저변에서부터 쏟아지는 많은 요구와 갈등을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몇 가지의 가치로 줄이는 ‘의제의 단순화’가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사회의 각계각층과 지역, 혹은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에게서 표출되는 여러 이익과 갈등이 끊임없이 단순화되어야 유지되고 작동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리고 정당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정당은 지역 지구당에서의 활동 등을 통해 많은 이익과 갈등 중 대다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의제를 취사선택하여 공약이나 정책으로 만들고 국민들에게 제시한다. 의제를 선점 및 제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체 혹은 조직이 정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익단체는 정당만큼의 폭넓은 이해관계나 계층을 대변할 수 없고 시민단체는 공공성이 강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사적인 이익까지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미디어는 민주적인 책임성의 테두리 밖에 있는 조직이다. 요즘 제기되는 대안으로써의 직접민주주의는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가상의 광장에 모일 수 있는 시간적, 재산적 여력이나 기술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대변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아직도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이며 앞으로도 이 자율적 결사체를 대체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나타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상과 현실 민주주의를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국민의 계몽된 이해를 필수 조건으로 말한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하거나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될 때면 그러한 선택을 한 유권자의 무지를 호되게 질책하며, 투표권을 포기한 사람들 또한 민주주의의 퇴행을 방조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비판한다. 우리나라의 지역주의적인 투표 성향을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비판하거나, 현격히 낮아진 투표율을 근거로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꼬집는 여러 정치인과 언론의 모습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국민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은 실제로 표의 지역적 편차가 나올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는 우리 사회의 계층과 이념에 기초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부재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낮아진 투표율을 근거로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들을 공격하는 행태 또한 자신의 소중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게끔 하는 사회의 여러 제약 요인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일찍이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hatts‐chneider)가 지적했듯이, 시민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정치와 민주주의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체제 안의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실현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정책과 이념을 제시하면 그중에서 몇 가지를 국민들이 선거란 기제를 통해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당은 자칫 단순해질 수 있는 제안과 선택의 정치과정에 밑에서부터의 투입이라는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정치와 민주주의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나라의 지역주의적 투표성향과 낮은 투표율의 원인을 바라본다면 결국은 국민들의 무지가 아니라 정당들이 제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적 투표성향과 낮은 투표율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성과 책임성의 문제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는 체제가 아니라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그들을 대신해 통치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선출된 대표자에게 어떻게 지속적으로 국민들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대표자가 임기 중 권한을 대신해서 행사한다는 대표성만 강조되고 권한을 위임해준 주권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학자 기예르모 오도넬(G. A. O'Donnell)이 개념화한 ‘위임 민주주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위임 민주주의 체제의 통치자는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임기가 있는 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권력은 사유화되고, 정치는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이 된다. 또한 국민의 참정권은 약해지고 정치인과 정당은 사회에 해악적인 존재가 된다.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제기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통치자의 대표성과 책임의 연결고리가 약화된 데서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 총과 칼로 하던 것을 투표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란 말이 있다. 이러한 정의가 함축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기득권과 일반 국민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끊임 없이 수반되는 정치체제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된 국가는 그 성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계속해서 민주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유리알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민주주의의 문제로 우리나라는 국민들로부터 300명의 국회의원과 1명의 대통령이 권한을 위임받아 통치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국민이다. 이들은 수적으로나 규범적으로, 심지어 법적으로도 그들의 대표자와 비교해 우위를 선점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힘의 우위가 국가와 체제의 운영을 더 잘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진 못한다. 국민의 ‘힘’과 그 힘이 ‘결정’할 수 있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국민들은 엄청난 수와 그 다양성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합의된 결정을 직접 이끌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국민들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대표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표자를 뽑고 통치를 위임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대표자가 행했던 그간의 통치행위에 대해 심판을 내린다. 민주주의는 이상만 가지고 발전하지 않는다. 현재 민주주의의 현실이 대의 민주주의임을 직시하고,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의 소중함을 되새겨 적극적으로 행사할 때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