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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아! 일어나라! - 영국과 프랑스의 여성참정권 운동
제 875 호    발행일 : 2014.03.31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여성이면서 30세 미만이라면, 이번 선거일에는 투표할 수 없습니다!”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하겠지만 1918년 영국이라면 가능한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해 당신이 프랑스 여성이라면 언감생심 투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성인 여성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인 투표권(참정권)이 불과 1세기 전 지구 반대편 유럽에선, 그것도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우는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

 

  의회정치를 시행하고 있는 영국에서조차 참정권은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권리가 아니었다. 19세기 3차례에 걸친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1884년 제3차 선거법 개정이 된 후에도 성인 남자 중 2/3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노동자 및 빈민은 상당수 제외되었으며 여성은 아예 선거권이 없었다.
  제3차 선거법 개정에 따른 선거권의 자격을 살펴보면, 세대주(독립된 가옥에 거주하는 소유자나 임차인), 점유자(연 10파운드 이상 세를 내는 토지나 건물 소유자나 임차인), 세입자(연 10파운드 이상 세를 내는 방을 임차한 자), 토지보유(40실링 이상 세를 내는 농지 임차농), 입주고용자(본인소유나 임차가 아니어도 일자리, 관직으로 얻은 독립가옥 거주자), 대학교 졸업자, 자유인(1832년 이전에 자격이 인정된 지역구에서 태어나거나 도제가 된 자유민)만이 선거권 자격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루어진 제4차 선거법 개정에서야 비로소 21세 이상의 성년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제한 선거권이 부여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의 여성참정권 획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노동계급의 참정권운동부터 살펴봐야 한다.

 

1. 노동계급의 참정권 운동: 차티스트운동(Chartist Movement, 1838~1848)
  산업혁명으로 인한 농촌인구의 도시이동으로 기존의 ‘부패한 선거구(40실링 이상의 세금을 내는 농민에게 선거권을 주는 선거구)’가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주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이루어진 제1차 선거법 개정은 결과적으로 도시 중산층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법 개정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에 선거권을 얻지 못한 노동자 계급은 의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성인 남자 보통선거권을 비롯하여 무기명 투표, 의원에 대한 급여의 지급, 의회의 매년 개선, 선거구의 평등, 의원의 재산자격 철폐의 6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한 인민헌장을 간행했다. 그리고 3차(1839년, 1842년, 1848년)에 걸친 청원운동을 벌였다.
  1848년 4월 런던에서 대청원 시위운동을 시도하였으나 무력에 의해 제압되고 청원은 하원에 전달되었으나 부결되었다. 1848년 이후 대륙의 혁명운동이 후퇴함에 따라 이 운동 역시 크게 후퇴하였으며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한 재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1850년대 들어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는 아일랜드 지주출신의 전 하원의원 오코너(Feargus O’Conner)와 ‘런던 노동자협회’의 지도자였던 러벳(William Lovett) 등이 있다.
  10여 년에 걸치 이러한 운동의 확산에는 지역공동체를 단위로 한 폭넓은 노동자계급과 여성 참가자들의 폭넓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 여성의 참정권 운동
  영국에서 여성참정권 운동의 단초는 앞서 언급한 차티스트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차티스운동의 지도자였던 러벳은 여성도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참정권을 포함하는 요구가 너무 급진적으로 보여 남성노동자의 선거권 요구 수용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공식 요구조건에서는 빠졌다.
  여성참정권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과 요구는 1860년대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1867년 자유당 소속의원으로서 여성 1,500명의 서명을 담아 여성참정권을 공식 의제로 삼은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밀은 남녀 모든 성인이 보통선거권을 행사해 정치참여의 권리를 갖지 못하면 ‘그릇된 민주주의(False Democracy)’라고 봤다. 그러나 밀과 자유당 일부 의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대론자들의 거부로 번번히 부결되고 말았다.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여성참정권 운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 이 시기는 여성의 대학교육 시작과 남성전문직에 대한 진출시도, 젊은 여성들의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여성참정권 운동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지고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옥외 대중집회와 정치인 항의방문, 관공서 유리창 깨기 등 다양한 시민불복종 운동 방식이 감행됐으며 일부 운동가들은 과격한 운동방식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종식됐으나, 전쟁종식 후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의한 여성의 역할증대로 마침내 1918년 제4차 선거법 개정(국민대표법)이 제정돼 30세 이상의 여성이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1918년 제4차 선거법 개정이 있은 후 10년이 더 지난 1928년이 돼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여성참정권 운동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 프랑스의 여성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1748-1793)의 말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국민의회는 모든 인간은 ‘자유, 소유, 안전에 대한 그리고 압제에 대항할 수 있는’ 천부인권을 가졌다고 천명한다. 이른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승인이 그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혁명기 제헌의회는 인간평등과 주권재민의 원칙을 선포했지만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문제는 여전히 논의 밖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Citoyen)’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적.정치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혁명기 프랑스 사회의 이상적 여성상은 ‘공화국의 어머니’였다. 즉, 여성의 임무는 아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랑을 심어줌으로써 아이들을 훌륭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여성들이 정치집회에 참석해 혁명 원칙을 배우는 것은 허용됐으나, 정치토론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1791년 9월에 완성된 헌법초안에는 민법상 성인 연령규정을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하고, 여성도 이성적 사유능력과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했다. 그러나 ‘참정권’에 있어서만큼은 ‘남성의 권리’만이 언급되었다.
이에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본떠 만든 ‘여성과 여성시민을 위한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1. 프랑스 혁명과 페미니즘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의 참정권요구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제기됐다. 혁명기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해방과 보편적 인권의 획득을 꿈꿨다. 혁명 공화국의 출현은 남녀의 정치적 권리문제만이 아니라, 남녀간의 개별적 관계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부여했다. 하지만 혁명을 계기로 ‘공민으로서 여성의 역할’이 제기되었다 하더라도 현실의 문제는 혁명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여성이 시민적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공민적 자유, 즉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만든 1791년 9월의 법은 프랑스 여성에게 시민적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공민적 권리 획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역설을 낳고 말았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페미니스트들은 여러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보편주의에 근거한 양성평등 및 여성해방을 주장했다. 1848년 3월 보통선거의 도입과 더불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치강령에 정치적 권리를 포함시키고, 선거에 직접 출마해 구체적으로 정치권의 문제를 제기하곤 했다. 1876년 급진적 페미니스트인 위베르틴 오클레르(Hubertine Auclert)가 ‘여성권리협회’를 설립하면서 여성참정권운동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요구를 둘러싼 프랑스 페미니스트 그룹의 행동양식은 아주 다양했다.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적극적 행동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프랑스 여성참정권운동은 주로 온건파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중단되었던 여성참정권 운동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보수주의자들의 지지가 늘어나면서 확대됐다. 특히 1919년 교황 베네딕트 15세가 여성참정권을 인정하면서 카톨릭 여성단체들의 참정권 지지가 확대됐으며 마침내 1920년 카톨릭조직으로 여성참정권문제에 전념할 ‘전국여성참정권연맹(Union Nationale pour le Vote des Femmes)’이 설립됐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카톨릭 여성운동으로 여성참정권 지지자들이 늘어나자 제3공화국 최대정당인 급진당은 보수적 성향의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될 경우 공화정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여겨 여성참정권에 대한 법안들을 상원에서 부결시켜 버렸다.

 

2. 제2차 세계대전과 참정권의 획득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여성들은 조국수호를 위한 시민정신을 여실히 보여줬다. 프랑스 여성들은 자원병으로, 노동자로, 간호사로, 사무직원으로 동원됐으며, 특히 군대조직에 여성들이 동원됨으로써 여성시민권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여성부대원의 수는 1만 3~4천명 선으로 전체군대의 2~3%를 차지하여 여성들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지만, 항독운동에 참여한 전체 여성의 비율은 전체 항독운동가들의 10~20%를 차지했다.
  1944년 1월말 ‘레지스탕스의회’라 불렸던 ‘임시자문의회’는 장래 프랑스의 공권력 조직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24일 임시자문회의에서 여성선거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전쟁 중 여성의 역할증대로 해방이후 국가의 구조개혁에 있어 여성선거권문제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었지만, 여성이 선거권을 획득함으로써 보수성향의 유권자가 늘어날 것을 우려한 임시자문회의 내 급진파들이 여성참정권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시자문회의 국가개혁위원회는 국가개혁안 제16항에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조건을 가진 선거권자’라는 조항을 추가했고 이 조항은 67명의 투표자 중 찬성 51표, 반대 16표로 가결됐다. 개혁안의 여성참정권에 대한 조항은 1944년 4월 사실상의 임시정부였던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CFLN)의 행정명령 제17항으로 다시 채택됐다. 온전한 여성참정권은 같은 해 10월 행정명령에 의해 다시 확인됐고, 1945년 4월 시의원 선거와 10월 하원선거에서 여성들은 처음으로 참정권을 행사했다.
  1848년 3월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선거를 도입한 프랑스이지만, 정작 프랑스의 여성참정권 획득은 뉴질랜드(1893)를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1902),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5), 소련(1917), 캐나다(1918), 독일.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1919), 미국.헝가리(1920), 인도(1921), 아일랜드.영국(1928), 스페인(1930), 심지어 터키(1934), 필리핀(1937)보다도 훨씬 늦은 것이었다.

  2014년 6월 4일은 지방선거가 있는 날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땅의 많은 민주적 권리와 절차들도 우리 앞에 살아간 누군가의 피와 땀의 결과라면,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마땅한’ 권리를 그저 하루 쉬는 ‘노는 날’과 맞바꿀 수 있을까는 심각히 생각해 볼 일이다. 역사는 순환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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