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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카쿠 열도, 누구의 땅인가?
제 876 호    발행일 : 2014.04.14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가 집권한 이후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망언이 도를 넘고 있다. 급기야는 일본의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기술하기로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를 격분케 하고 있다.
  이에 이번호 학술면에서는 일본이 중국과 영토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에 대해 알아봤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센카쿠 분쟁은 우리가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센카쿠는 일본이 실효지배를 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론 엄연히 중국의 영토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북아 안보를 위협할 만큼 일본과 중국의 갈등이 심각한 지역이기도 하다. 센카쿠 열도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독도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현재 실효지배 국가가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센카쿠 열도 어디에 있나?

  센카쿠 열도는 동중국해 남서부에 위치한 섬들로 사람이 살지 않는 5개의 무인도와 3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센카쿠 열도는 타이완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70㎞, 일본 오키나와 현에 속한 이시가키(石垣) 섬으로부터도 약 170㎞ 떨어져 있다. 반면 중국본토로부터는 약 330㎞, 일본 오키나와 본도로부터는 약 410㎞ 떨어져 있어 본토의 거리상으로는 중국에 가깝다. 총면적은 육지 면적이 6.32㎢로 작은 편이지만 해양 면적 약 3만㎢로 넓다.
  일본 행정 구역상으로는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 시(石垣市)에 속해있으며, 중국의 경우는 타이완 성 이란 현(宜蘭縣)에 속해 있다. 현재 일본이 실효지배를 하고 있으며 타이완과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와  ‘댜오위다오’

  일본에서 부르는 센카쿠라는 이름은 한자로 ‘뾰족할 첨(尖)’, ‘집 각(閣)’으로, 뜻을 풀이하면 ‘뾰족한 집’, 즉 ‘뾰족한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센카쿠라는 이름은 영어권에서 이 섬들을 부르는 피너클 제도(Pinnacle Islands: 뾰족한 섬들)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피너클 제도’라는 이름은 1884년 이 곳을 지나던 영국 해군이 붙인 이름이다. 때문에 일본 이름 ‘센카쿠(尖閣)’는 영어 이름 ‘피너클(Pinnacle)’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일본이 이 섬들을 주인이 없는 땅이라 하여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것이 청일전쟁 중이던 1895년이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댜오위다오(釣魚島)’라고 부른다. ‘낚시 조(釣)’, ‘고기 어(魚)’로, 뜻을 풀이하면 ‘고기를 낚는 섬’이 된다. 댜오위다오에 대한 기록은 중국 명나라 영락(永樂) 원년인 1403년에 출판된 <순풍상송(順風相送)>이란 책에 ‘조어서(釣魚嶼)’로 처음 등장한다. 또한 1863년에 중국에서 만든 세계지도인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에는 푸젠성(福建省)에 부속된 댜오위타이 군도(釣魚台群島)로 표시돼 있다. 역사상으로는 ‘센카쿠’보다는 ‘댜오위다오’라는 이름이 더 정통성이 있어 보인다.

 


왜 분쟁지역이 됐나?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센카쿠 열도는 오키나와에 살던 후쿠오카 현 출신 사업가 고가 다쓰시로(古賀辰四郞)가 1885년에 처음 발견했고, 일본 정부가 무주지(無主地)임을 확인하고 나서 1895년 1월에 오키나와 현에 정식 편입됐다. 이후 청일전쟁에 패한 중국이 타이완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일본에 할양하면서 센카쿠 열도는 자연스레 일본이 지배하게 됐다.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벌어졌다. ‘일본이 강제로 점령한 영토를 돌려줘야 한다’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일본이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센카쿠 열도의 반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은 1972년까지 오키나와를 위임통치 했고, 센카쿠 열도는 미국이 위임통치하는 오키나와의 관할로 편입됐다. 미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된 오키나와를 일본이 반환 받으면서 센카쿠 열도 역시 일본의 실효지배에 놓이게 됐다.
  한편 1969년 UN의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Far East)의 주도로 아시아 근해지역 광물자원 공동탐사가 이뤄졌다. 조사결과 센카쿠 열도 부근 해역에 천연가스와 석유가 대규모로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공표됐다. 더욱이 센카쿠 열도가 위치한 동중국해는 흑해 유전만큼이나 많은 석유가 매장돼 있다고 알려졌다. 또한 열도가 위치한 인근 바다에는 중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시라카바 가스전이 위치해 있고, 그 북쪽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다투고 있는 7광구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원들은 단일한 유전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성장으로 대규모 에너지 소비국으로 변모한 중국으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영유권에 대한 일본과 중국의 주장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1885년 주인이 없는 센카쿠 열도를 발견했고, 정부의 확인을 거쳐 청일전쟁의 결과인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체결 전인 1895년 1월에 일본영토로 정식 편입했기 때문에 강제 점령한 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 정부가 타이완과 펑후 제도를 반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센카쿠 열도를 오키나와 관할로 편입해 위임 통치한 것은 이 열도가 타이완이 아닌 류큐 제도(오키나와 현)의 부속 도서임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1972년 오키나와 현이 미국으로부터 반환될 때 센카쿠 열도도 함께 반환된 것이므로 센카쿠 열도는 당연히 일본 영토라는 입장이다.
  반면 중국은 1863년에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황조일통여지전도>에 이미 센카쿠 열도가 푸젠성에 부속한 댜오위타이 군도로 표시돼 있던 중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영토인 ‘댜오위다오’를 청일 전쟁 와중에 일본이 주인이 없는 섬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편입하여 ‘센카쿠’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댜오위다오를 중국에 반환하지 않고 오키나와의 관할 안에 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대만과 중국이 모두 초청받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으며, 중국은 건국 이후 댜오위다오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점거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센카쿠 열도 관련 주요 사건

  1972년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가 시작된 직후 중.일 간 직접적인 군사적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외교적 마찰과 민간 차원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의 한 우익단체는 센카쿠 열도에 등대를 설치해 일본의 영유권을 기정사실화하려 했고, 중국과 타이완의 국민들은 항의시위로 맞섰다. 1996년에는 센카쿠 인근 해역에서 일본의 등대설치에 항의하던 한 홍콩 시민이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차원의 대응은 소극적인 편이었다. 1992년 센카쿠 열도를 포함시킨 영해법 발표, 1995년 해양조사선 파견, 1996년 센카쿠 인근에서의 군사훈련 등을  진행했으나 일본과의 분쟁이 확대되지 않는 선에서 조절됐다. 이는 당시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국의 국내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일본과의 불필요한 갈등으로 자국의 경제발전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던 중국 정부가 최근 들어 센카쿠 열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자신감과 센카쿠 열도의 경제적.안보적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최근의 주요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0년 9월 중국어선 한 척이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조업 중 일본 순시선에 나포됐고, 일본은 해당어선의 선장을 체포 후 구속한다. 중국은 강력히 항의하며 선장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중국은 일본에 대한 보복조치를 실행한다. 자국민의 일본여행 제한, 일본에 발전용 석탄 공급계약 협의 중단, 항공노선 증편 협상 중단, 중국 체류 중인 일본인 4명을 군사시설 촬영혐의로 체포, 첨단제품의 필수원료인 희토류의 일본 수출 전면 중단 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은 결국 중국의 보복조치에 굴복하여 억류했던 중국 선장을 석방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본도 반격을 시작했다. 2012년 4월 극우 정치인으로 당시 도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도쿄시의 센카쿠 열도 매입을 추진한다. 이어 8월 홍콩 시민단체가  센카쿠에 상륙해 중국 오성홍기와 대만 청천백일기를 게양한 반일 시위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9월 일본 정부는 정부차원에서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한다.
  일본의 국유화 조치에 중국 정부는 센카쿠 열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해기선에 포함시킨다고 선포했다. ‘영해기선’이란 한 국가의 영해가 시작되는 선으로 센카쿠 열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선포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센카쿠 열도에 해안 감시선과 항공기를 보내 순시활동을 시작했고, 이후로도 수시로  감시선과 항공기를 파견해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 지배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2013년 7월 해경국을 신설했는데 이는 해경 감시선을 중무장시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중국의 무력시위에 일본도 해상자위대 전투기를 발진시키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특히 아베신조 현 일본 총리는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을 타협과 절충으로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미국도 센카쿠 열도가 미.일 방위조약의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해양 영토 분쟁’의 해법은?

  농업생산물에 의지하던 과거에는 비옥한 토지와 노동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산업혁명으로 공산품이 국가의 부를 대변할 때는 원자재와 소비시장 확보를 위해 전쟁이 벌어졌다.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후 대규모 정복 전쟁은 사라졌지만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을 놓고 벌이는 분쟁은 오히려 빈번해졌다.
  특히 자국 연안으로부터 200해리(370.4㎞)까지의 수역에 대한 모든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일반화되면서 해양자원을 놓고 벌이는 각국의 영토분쟁도 빈번하다. 더욱이 한·중·일 3국이 위치한 동북아는 지리적 인접성으로 EEZ의 200해리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쟁이 불가피하다.
  그 해결을 힘을 통한 무력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협상과 타협을 통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인지 한·중·일 3국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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