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어독문학과 문광훈 교수
트로츠키(L. Trotzky)의 프로그램 - “평균적 인간도 아리스토텔레스나 괴테 혹은 마르크스의 수준으로 고양될 것이다”는 혁명적 열망은 쉽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유행과 본능과 충동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듣고, 횔덜린의 시를 읽으며,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해하고, 클레 그림의 동화적 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은 아마 늘어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줄어들 지도 모른다. 교양과 더불어 사람은 고급문화로 옮아가리라고 아놀드(M. Arnold)나 밀(J. S. Mill) 그리고 훔볼트(A. Humboldt) 같은 문화교양론자들은 믿었지만, 교양의 그런 현실적 확산은 쉽사리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문학을, 특히 한국에서의 인문학을 바라보면 어떤가? 그것은 간단치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해 암담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 암담한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한 사람인 내게 학교 신문사는 현재의 연구분야에 대해 써달라고 요청했다.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데도 그 이유는 각각 다를 것이고, 이때의 학문이 인문학일 경우 그의 탐구가 생활과 분리되긴 어렵다. 그러니 지나온 이력과 실존적 고민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언급 가운데 취향과 기질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진술은 과장되기 쉽다. 나는 지나온 내 이력을, 이 이력 위에 자리한 지금의 문제의식을 냉정하게 쓸 수 있는가?
1. 왜 문학이고 예술인가?
나의 학문적 꿈은, 줄이자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운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란 문제를 예술을 통해, 예술의 경험 속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쯤은 학문의 인식활동이고 반쯤은 예술의 표현활동이면서 매일 매순간 내 삶을 사는, 살면서 이 생활을 반추하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꿈은 해묵은 것이다.
대학 2-3학년을 지나면서 날 사로잡은 일의 하나는 표현에의 충동이었다. 나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것, 나의 꿈과 욕망과 좌절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못다함을 언어로, 기억할 만한 시와 아무도 쓰지 못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어떤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나날의 불충과 쌓여가는 회한을 하릴 없이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곱씹을 만한 무엇으로 변형시키고 싶다는 것, 이런 생각의 벽돌로 작은 방을 만들고, 이 방에 들어앉아 낯선 대상과 교류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마치 피곤에 지치면 여름나무 그늘이나 호숫가 벤치로 찾아들듯이, 하나둘씩 내 책을 찾아들고 어떤 구절에서 위로와 공감을 얻게 되기를,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예술이기를 나는 오랫동안 꿈꾸었다.
왜 그런가? 예술의 언어는 섬세하되 철학처럼 논증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에 열려 있되 사회과학처럼 설명과 분석으로 자족하지 않으며, 사실을 존중하되 자연과학 같이 대상을 실험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나/개인/경험/육체/감각에 충실하면서도 가시적 차원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지평을 잊지 않으며, 초월적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세속적 범사(凡事)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진실을 강변하거나 자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암시와 비유의 언어이고, 비강제적 자발성의 표현이다. 이 점에서 예술의 언어는 존중할 만하고, 더 넓게 인문학은 대체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단지 예술의 이 반성적 비판적 잠재력은 오늘의 현실에 맞게 더 세련되고 유연하게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시장근본주의적 광풍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시와 소설과 희곡을 따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또 문학과 회화와 음악을 서로 무관한 듯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음악성과 음악의 회화성, 회화의 시적 이미지와 문학적 몽상을 하나로 꿰는 것, 이 차이를 아우르는 공통분모를 심미적 경험에서 탐색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시와 음악과 소설과 그림과 건축과 춤과 연극과 조각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어떤 에너지로 삶의 풍경을 평화의 풍경으로 바꾸는 일, 이 일을 나는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들. 내가 표현한 이 내적 세계에 외적 현실이 과연 호응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 이런 막연한 갈망에 파묻힌 채 나는 오랫동안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쓰며 지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얻은 그 당시 생각 중의 하나는 가장 필요한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론적 무장을 통해 감각이 다채롭게 반응하도록 열어두고, 사고가 정밀하게 전개되도록 훈련하며, 이렇게 열린 감각과 훈련된 사고의 내용을 신선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기나긴 ‘섬세화 과정’ - 영육의 즐거운 성장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시를 좋아하고 소설을 즐겨 읽은 탓에, 또 그림을 보며 명상하는 것이 자연스런 취미의 하나였고, 음악은 변함없는 벗이었으므로, 그 시간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1999년 학위논문 이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할 때 내가 설정한 목표는 세 가지였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윗』(1605-06)
다윗이 든 것은 골리앗의 머리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머리다. 무슨 뜻일까? 패배했다는 것, 그르치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조금은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 이런 자기직시 없이 어떻게 우리는 삶의 갱신을 도모할 수 있는가? 인문학의 힘은 자발적 자기직시의 용기로부터 온다.
2. 세 가지 목표
지난 11년 동안 나는 열 권의 책을 출간했고, 세 권은 곧 출간될 예정이다. 그리고 세 권의 번역서를 냈다. 작업은 대략 세 방향이다.
첫째, 독일 문학과 문예이론, 철학과 미학의 읽기다. 이것은 지금까지 쓴 독문학 관련 논문 외에 사실 거의 모든 글의 바탕을 이룬다. 페터 바이스의 『소송/새로운 소송』(2010)을 번역했고, 학위논문은 『부재에의 참여 -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 읽기』란 제목으로 곧 나온다. 좀더 본격적 저술인 『가면병기창 -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은 현재 탈고되었고, 내년에 출간될 것이다.
둘째, 이렇게 읽은 것을 한국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문화에 접목시키는 비교문학적·비교문화적 작업이다. 김수영의 시에 기대어 비평론과 예술론을 펼친 『시의 희생자 김수영』(2002)이나 장정일론인 『정열의 수난』(2007), 『한국현대소설과 근대적 자아의식』(2010) 그리고 강운구 사진에 대한 평문 「거친 현실의 내면」(2004)과 「우리 삶이 지나온 자리」(2006)는 그 예다. 사진작가론인 『요제프 수덱』(2004)과 아서 쾨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2010) 번역도 있다.
이런 작업에서 이론적 방향타 역할을 한 사람은 여럿이지만, 그 중심에는 김우창이 있다. 이 인문학자에 대한 이해작업은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2001) 이후 『김우창의 인문주의』(2006)와 『아도르노와 김우창의 예술문화론』(2006)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그와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 마음-지각-이데아』(2008년)에서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 가을에는 『사무사(思無邪) - 김우창의 비평정신』이 부산대학교 ‘우리 시대의 고전 읽기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다.
셋째는 외국문학과 문예이론 그리고 한국문학과 예술문화를 통해 나 자신의 예술론과 미학을 정초하려고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거나 개념적 언어로서가 아니라 에세이 형식을 빌어서 자유롭게, 그러나 철학적 엄밀성을 잊지 않은 채, 쓰려 한다. 나는 나의 글이 독자에게 ‘어떤 다른 가능성에 대한 즐겁고도 진지한 경험’이 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숨은 조화』(2006)가 이렇게 나온 첫 미학서라면, 『교감』(2007년)은 대중적 교양서고, 『렘브란트의 웃음』(2010년)은 세번 째 예술론이다.
3. 인문학, 반성적 자기 조직의 기술
나는 예술경험이 개인의 자율성과 공적 책임성을 하나로 잇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글로, 시적 산문으로,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증거하고 싶다. 그러나 이 바람이 얼마나 성공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감각과 언어와 사유와 표현의 능력을 동시에 요구하고, 현실과 문학과 인간과 사회와 철학과 역사와 자연의 공부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대학 안의 세계마저 시장화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간다고 해도, 또 시장과 자본과 상품이 아무리 우리의 생활세계를 뒤흔든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이 선 곳 -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질의하는 한, 그래서 제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한, 인문학적 탐구를 포기할 수 없다. 인문학이란 자기자신(개별성)에 대한 탐구이자 삶 일반(보편성)의 더 나은 가능성에 대한 탐구인 까닭이다. 이 물음은 자기로부터 시작한다.
인문학은 반성적 자기조직의 기술이다. 왜 ‘자기조직’인가?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몸에 관련되고, 이 몸의 느낌을 통해 자기 삶을 변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기조직은 타인이 그의 삶을 조직하는 데 이런저런 영향을 준다. 말하자면 자기조직을 통한 타자조직이다. 이 조직은 작품에 기대어 자기 삶을 거울처럼 ‘다시(re) 비춰봄(flex)’으로써 이뤄진다. 즉 ‘반성적’이다. 단지 낯선 것에의 호기심이 어떤 지배충동이 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 ‘기술’인가? 그것은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차탁마 속에 힘겹게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평생 지속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삶의 자기조직을 통한 즐거운 형성과정(Bildungsprozeß)이다. 각자가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면, 그래서 충만한 삶의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인문학은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목련이 지고 있고 벚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 옆 대나무 잎은 늘 푸르고, 등나무 넝쿨은 아직 싹도 틔우지 않았다. 오는 듯 봄이 떠나고 있다. 글은 결국 자연의 운행을 닮아야 할 것이다. 지금 계획하는 서너 권의 책이 끝나면, 다음에는 단 한 가지 몽테뉴의 『에세이』 같은 책을 쓰고 싶다. 철학과 미학과 과학과 역사의 고전에다 다양한 예술감상과 자연관찰이 담긴, 어떤 혼란스럽고도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정연함을 잃지 않은 하나의 세계, 이것을 담담하게 기록한 1000쪽짜리 책을 3권 쓰고 싶다. 이 부질없는 일이 끝나면, 아니 이 작업 중에도 나는 쉬고 보고 읊조리고 들으며 향유할 것이다. 늘 새롭게 사람을 만나고 세상의 폭과 깊이를 다르게 느끼게 하는 글을 나는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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