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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웃음의 문화. 세계와 나의 한계를 넘는다
제 850 호    발행일 : 2012.09.04 


           윤선자(사학과 강사)
 
서양 유럽에서 근대의 시작은 르네상스였다. 이 시기는 과도기로서 중세의 낡은 질서가 허물어지고 근대의 새 질서가 윤곽을 드러낸 시기이다. 새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 먼저, 건설을 위한 망치 소리보다는 해체를 위한 망치 소리가 더 요란했다. 창조와 파괴는 맞물린다. 창조를 위해서는 먼저 파괴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창조를 위한 디오니소스적인 정신과 디오니소스적인 춤판을 주장하면서 ‘먼저 파괴하라’고 했다. 낡은 모든 도덕관념을...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기에 파괴를 위한 망치를 휘두르며 디오니소스적인 춤판을 벌인 사람은 누구였을까? 광인, 혹은 광대들이었다. 광인들은 르네상스 발원지인 이탈리아보다는 북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 지역 등 중세적 잔재가 강했던 곳에서... 왜? 그곳은 파괴해야 할 낡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발생했다. 거긴 상업이 발달해 이미 13세기부터 시민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르네상스 인문주의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1500년경 이 문화는 이탈리아를 넘어 북유럽으로 북상했다. 그러면서 르네상스 문화의 성격도 변했다.
무엇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은 비판적이었다. 정치와 사회, 특히 종교의 타락과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그건 천 년 동안 인간성을 억압해온 교회 권력을 파괴하려는 운동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의 통쾌한 해학과 익살, 패러독스 앞에 교회의 권위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역사상 그 어느 시기도 해학과 풍자가 그만큼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한 때는 없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정신이 바로 광기의 정신 혹은 광기 담론이다. 푸코는 광기를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라고 했고, 호이징하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광기는 무엇인가?
광기하면 현대인은 정신적인 질병을 떠올린다. 그것이 근대적 편견임은 이미 오래전에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밝힌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시대 광기는 신적인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무모함(hubris)을 의미했다. 중세 광기는 양가적(兩價的) 의미를 가졌다. 한편으로 어리석음과 신의 저주, 인간의 불행 등을 상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리를 들여다보는 남다른 능력을 의미했다. 즉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보는 능력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광기는 중세의  양가적 의미를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훨씬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광인들은 광장과 시장의 한가운데서 웃고 춤추며 기존의 정치와 종교, 도덕을 뒤집었다. 해학과 익살,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통해. 당시 광기는 세상의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뒤집어 보는 비판적 능력, 즉 풍자 정신을 의미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풍자가 냉소적인 독설이라기보다는 웃음을 터트리는 유쾌한 역설, 친숙함과 긍정을 담아내는 정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광기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유쾌한 웃음의 문화는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중세의 민중문화, 특히 카니발이다.
 카니발은 중세의 대표적인 민중 축제다. 카니발 기간에 사람들은 신나고 익살스러운 변장을 하고 춤추고 즐겼다. 축제의 본질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해 현실의 질서를 마음껏 뒤집었다. 카니발 정신은 곧 웃음과 광기의 정신이며, 카니발의 히어로는 광인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 광인의 목소리는 하늘 아래 거침없이 울려 퍼졌고 그것은 회화와 문학에도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는 ‘축제의 계절’이었다. 그 축제는 한편으로는 도시의 영광과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중하층 시민들의 정치적 비판과 풍자가 폭발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세처럼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성이나 사내답지 못한 남성들이 조롱당하며 끌려 다녔다.(샤리바리charivari) 이 외에도 악덕상인이나 부패한 정치인, 타락한 성직자들 역시 축제 때 끌려 나와(대부분 당사자의 마네킹) 내팽개쳐지고 오물이 던져지고 두들겨 맞았다. 이런 ‘정치적 연극’을 지배한 담론은 익살과 조롱, 욕설이 난무하는 광기 담론이었다.

[그림1] 메르폴의 인장 : 바로 보면 광인이지만, 뒤집어 보면 학자이다.

거침없는 풍자로 유명한 디종의 축제 단체, 메르 폴(Mere Folle:미친 어머니라는 뜻)의 연극무대는 ‘욕설의 마차’로 불렸다. 그만큼 그들의 정치적 풍자는 대담했다.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택한 이 단체에게 광기란 뭐였을까? 그들이 들고 있는 지팡이 끝에는 광인의 머리가 달려있는데, 그 머릿속에서 피어난 꽃이 있다. 지혜의 상징인 물망초다. 또 그들은 광인의 머리와 학자의 머리를 결합한 독특한 이미지를 인장으로 사용했다.[그림1] 광인과 학자, 즉 광기와 지혜는 같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광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또 다른 지혜였다.
축제라는 공간에서 울려 퍼진 광기 담론은 회화에도 영감을 주었다. 그 영감은 이미 쇠퇴해가던 중세 스콜라주의와 상징주의에 비집고 들어가 광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중세 스콜라주의에 의하면 신의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고유하고 순수한 존재이유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학문과 예술에서 상징을 통해 이해되고 표현되었다. 하지만 스콜라주의를 공격한 신비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의 순수한 본질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없다. 그건 상상이나 이론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오히려 현실의 모든 존재는 대립과 모순의 요소들을 내포한 ‘하나의 둥근 공’과 같다. 대립과 모순의 총체로서의 세계, 그것이 진리이고 지식이다.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광인의 담론, 그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광기의 이미지가 담아내려는 것도 바로 이 진리이다.
 

[그림2] 멜랑콜리(뒤러)

이런 점에서 회화에 표현된 광기 이미지 역시 또 다른 지혜를 의미한다. 보쉬의 <광인의 배>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광인이다. 그만이 느긋하게 음식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보쉬의 또 다른 그림 <광기 치료>에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머리의 돌을 꺼내 광기를 치료하려는 ‘돌팔이 의사’다. 지혜로운 것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 알고 보면 지혜로운 것이다. Sophomore다! 뒤러의 <멜랑콜리>는 암시적이지만 훨씬 더 명확하게 광기의 의미를 드러낸다.[그림2] 거기서 멜랑콜리(광기)가 의미하는 바는 탐색과 사색, 즉 지혜이다.
 

[그림3] 광인으로 그려진 예수(홀바인) <광우예찬> 중에서

북유럽 인문주의의 대표작, 에라스무스의 <광우예찬>은 이런 문화적 토양의 산물이다. 그 책이 중세 스콜라주의와 교회를 비판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비판의 전략이 광기였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광기의 신 모리아(Moria)는 세상의 모든 생명과 기쁨, 행복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광기는 자연이며 자연에 가까울수록 인간은 행복에 가깝게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광기는 또 다른 지혜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왜? ‘예수의 어리석음(광기)’을 통해 그 점을 보여준다. 예수는 가장 어리석은 여성과 아이들, 어부와 어울렸으며, 어리석음의 상징인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무엇보다 신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태어나 십자가 희생을 자처했으니 그 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없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어리석음으로 인류를 구원했으니 그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그림3] 이처럼 에라스무스의 문학에서도 광기와 지혜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 허물어진 경계 속에서 중세 질서도 점점 해체된다.
결국 르네상스 시대의 광기는 역설과 아이러니, 해학과 익살로 가득 찬 풍자 정신이었다. 즉 웃음으로 세계를 비틀어보는 정신이다. 그것은 모든 기존의 질서와 개념을 뒤집고 무화(無化)시키는 가운데 낡은 질서와 개념을 서서히 해체시켰다. 하지만 그만큼 광기는 위험하기도하다.
17세기, 세계의 질서는 데카르트의 이성과 과학을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이성의 부재인 광기는 근대적 질서를 위협했다. 푸코의 지적대로 광기는 점차 내면화 혹은 감금되어야 했다. 우선 근대의 주역,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광기는 내면화되었다.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자 욕망인 광기는 그들의 정숙함과 위선 속에 숨어들었다. 내면화되지 못한 광기는 ‘환상, 실수, 착오, 과대망상 등으로 인식되었고, ‘미친 주정뱅이’, ‘기억과 이해력을 상실한 미친 사람’, ‘머리가 돌거나 혹은 텅 빈 사람’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감금당했다.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광기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만들어졌다.
근대의 이성이 광기를 감금한 이유는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신은 악마가 있어 더 위대하며 선은 악이 있어 더 절대적인 것과 같은 논리다. 광기의 비참함을 드러내고 그 배제와 소외를 통해 이성은 자신을 절대적 가치이자 통합의 구심점으로 세울 수 있었다. 18세기 이성이 지배한 계몽의 시대, 광인들은 태양을 보지 못하고 감금되었으며 광기는 무의식 속에 짓눌려 있었다.
 

[그림4] 백치(고야)

광기가 점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낭만주의 시대 때부터다. 낭만파 화가 고야는 광기의 화가다. 그는 광기가 가진 진리로서의 측면을 응시했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다. 그가 그린 <백치>의 웃음은 곧 광인의 웃음, 태초의 인간의 웃음, 그래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이 드러내는 웃음이다.[그림4]  19세기 말 니체 역시 광기와 웃음의 철학자다. 니체 자신이기도 한 차라투스트라는 곧 광인이다. 웃고 춤추는 광인, 세상의 모든 도덕규범을 뒤집어 엎으려는 광인, 새롭게 창조하려는 자유로운 정신의 화신이다.
광기는 현실을 뒤집어 한바탕 웃으며 춤출 수 있는 정신이다. 니체의 말대로 깊은 심연을 응시하면서 현실을 뒤집어 파괴하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터를 마련하려는 정신,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끓임없이 웃음을 던질 수 있는 긍정의 정신이다. 긍정의 정신으로서의 광기는 또한 인간을 자신의 비참한 조건 속에서 구원해주는 햇살이다. 사실 공포와 죽음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막연한 희망도 불가능한 기적도 아닐 것이다. 비참한 상황을 뒤집어 구사해낼 수 있는 한 마디의 유머와 그럴 수 있는 용기 그 자체이다. 에즈라 벤게르숌은 유대인들이 극한 역사적 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의 독특한 유머 감각이었다고 지적했는데, 그 점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명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광기의 정신은 멀리 있지 않다. 매일매일 현실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광기는 현실과 자신의 한계를 넘어(니체의 표현대로라면 ‘극복하고’), 웃고 춤추면서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정신이다. 현실은 모순과 부조리다. 그 속에 썩고 곪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고, 그렇다고 타협하지도 않고, 웃음과 춤으로서 그것을 뒤집고 앞으로 나가는 정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 의지이다. ‘삶에의 의지’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가장 나쁜 점은, 그대들 모두가 사람이 당연히 춤추어야 하는 방식으로 춤추는 것을, 다시 말해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춤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대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므로 부디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웃는 것을 배우라!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시켜라, 그대들 멋지게 춤추는 자들이여, 높게! 더 높게! 그리고 멋지게 웃음 짓는 것도 제발 잊지 마라!
웃는 자의 면류관, 이 장미꽃 다발의 화관, 그대들에게, 형제들이여, 이 화관을 던진다!. 웃음은 신성하다. 그러므로 그대들, 차원 놓은 인간들이여, 배우라, 웃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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